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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집현전 학자 하위지의 출생 및 관직생활 사육신의 처형 그리고 남겨진 후손

by yesjenny486 2025. 8. 2.

성미가 과묵하고 공손했으며, 항상 집현전에서 경연에 왕을 모시면서 학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품성이 강직해 대사간의 직분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문종 초기 왕이 병약하고 힘이 없자 권력을 농단하는 대신들의 월권행위와 실정, 부패행위 등을 적극적으로 공격, 비토 하다가 대신들과 문종으로부터 반격을 받았으나 승지 정이한과 정창손 등의 비호로 무사하기도 하였다. 오늘은 이런 하위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단계하위지 선생 유허비 (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

 

집현전 학자 하위지의 출생

 

1412년 경상도 선산군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추정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하담(河澹)이고, 어머니는 유면(兪勉)의 딸이다. 증조부는 하윤(河胤), 할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하지백(河之伯)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고려 후기에 사직을 지낸 사직공 하진의 13대 후손(사직공파)이다. 위로 형 하강지, 동생 하기지 등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출생한 날로부터 3일 동안 그의 생가집 앞을 흐르던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다 하며, 여기에서 자신의 아호를 따서 단계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형 강지와 함께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전한다. 배우자 귀금(貴今)과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 하호(河琥) 차남 - 하박(河珀) 장녀 - 하목금(河木今) 양자 - 하원(아명은 하귀동(河龜童)으로 하위지의 동생 하소지의 아들)이다 . 외조부인 유면, 아버지인 하담, 형인 하강지와 동생 하기지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였으며 특히 본인은 장원 급제하여 마을 이름이 장원방이 되기도 했다. 또한 막내 동생인 하소지는 생원시까지는 합격했다. 그러나 형제 모두 단종 복위 운동에 휘말려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아들인 하호, 하박도 함께 참형을 당하였고 아내 귀금과 딸 목금 모두 지병조사 권언(權躽)의 노비가 되었다. 하소지의 아들인 하원은 미성년자로 살아남아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되어 훗날 무관직에 오르게 된다.

 

 

집현전 학자 하위지의 관직생활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한 후 생원이 되고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에 임명된다. 그 후 세종대왕의 특별 명령으로 성삼문, 김질, 신숙주, 김문기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하기도 했으며 그 뒤 집현전 학자가 되어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정치를 보살폈다. 세종은 평소에도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손자 단종을 부탁한다고 거듭 지시하였는데, 1450년 장남 왕세자 향은 병약하여 일찍 죽을 것을 예감한 세종은 자신이 병으로 임종하게 되자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 홍위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고  하위지도 집현전의 다른 학사들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었다고 전해진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 즉위 직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고  1451년(문종 1) 수양대군을 보좌하여 《진설》의 교정과 《역대병요》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집현전으로 승진했다.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지만 이때 세상은 많이 혼란스러웠다 1453년(단종 1년) 11월 10일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최지호 등을 제거하고 반대파들을 숙청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계유정난이 일어났으며 1453년 음력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의정부영의정 겸 섭정에 오르자 하위지는 벼슬을 버리고 전사 간( 조선시대의 관청으로, 임금에게 간언하고 백성의 여론을 전달하는 역할 )의 자격으로 선산에 물러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간( 문하부에 소속된 관직 )으로 불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4년(단종 2) 집현전부제학으로 복직되자 대궐 옆에 있는 불당이 왕실에 이롭지 못함을 들어 이를 훼철할 것을 주장하였다. 동년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겸임 춘추관편수관으로 참여했고, 경연청에서 경연 시 강관으로 왕에게 경사를 강론하였다. 부제학·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455년(단종 3) 다시 직제학이 되었다가 예조참의가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예조참판으로 부르니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녹을 받는 대로 별실에다 쌓아두기만 했다. 곧이어 세자우부빈객( 왕세자의 교육과 보필을 담당하는 기관 )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 뒤 예조판서로 다시 승진 제수되었다. 세조는 즉위 직후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의 삼정승과 좌찬성, 우찬성이 육조판서들의 정무를 결재하는 의정부서사제에서 왕이 직접 육조판서들의 서류를 결재하고 정무를 주관하는 육조 직계제로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예조참판인 하위지가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즉위 직후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와 신념을 아껴 그에게 여러 번 교서를 내려 부름을 받아 예조참판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본 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먹지를 않았다 한다. 그러나 하위지는 세조의 강권정치에 맞서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추국의 명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는 즉위하자 왕권강화책으로 종전부터 시행하던 의정부 본래의 권한인 서사제를 폐지시키고 육조가 관장사무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왕에게 상계하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세조의 조처에 반대하고 고대 주나라 제도를 들어 의정부 서사제의 부활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이다

 

 

 

사육신 하위지의 처형  그러나 하위지의 후손은 남아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배반으로 붙잡혀 의금부에 끌려가 국문을 당한 후 함께 순절했다. 이때 국문장에 나타난 세조는 하위지와 사적으로 친한 사이라 그에게 "잘못을 했다"는 말을 한다면 용서해 줄 것이라고 하여 설득하였으나 그는 끝내 듣지 않고 거열형( 반역 및 강상죄인의 목과 팔다리를 수레나 소와 말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형벌  )에 처해졌다. 시신은 부인에 의해 수습되어 선산군 서쪽 고방산(古方山) 기슭에 안장되었으며, 1977년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에도 가묘가 조성되었다. 하위지는 사육신 중 박팽년과 함께 후손이 전한다. 사후 그의 아버지와 형제,  두 아들이 사형당하였으나 미성년자인 조카 셋이 살아남아 그중 동생 하소지의 아들 하원이 양자가 되어 대를 이었다. 1456년 세조를 죽여 단종을 복위하려고 꾀한 사육신의 변이 일어나자 세조는 하위지의 재주를 아껴 몰래 그에게 모의한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타일렀으나 그는 일소에 부쳤다. 문초를 받을 때 그는 “이미 반역자로 정해져서 사형을 받게 된 바에야 새삼 물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라고 대답하여 세조도 노여움이 좀 풀려 하위지만이 낙형( 조선시대 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져 고문을 가하는 신문 )을 받지 않았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 죄를 물어 죽이는 것을 의미 )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 세조는 국문장에서 그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모두 거절하였다. 그는 국문과정에서 성삼문, 유응부 등이 당한 작형(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박(珀)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을 두려워함이 없이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이미 살해되었는데 제가 어찌 혼자 살아남겠습니까? 조명( 조정의 명령 )이 없더라도 자결해야 마땅할 입장입니다.”라면서 노비로 끌려가게 된 누이동생더러 여자의 의리를 지켜 두 주인을 섬기지 말 것을 부탁한 다음 태연히 죽음을 받으니, 모두들 그 아버지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라 칭찬했다. 아들 하담과 하박은 처형당하였으나 16세 미만이었던 미성년자 조카 하포, 하귀동(동생 하소지의 아들), 하분(형 하강지의 아들)은 살아남았다. 하귀동은 뒤에 이름을 하원으로 개명하고 하위지의 양자가 되었다. 세조는 다른 사육신 특히 성삼문의 갓난 조카와 종손들까지 처형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위지 에게만은 예외를 두어 그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하위지 가문은 손자 박일산이 살아남아 후손을 전하는 박팽년가문과 함께 직계후손이 전하는 가문이기도 하다. 훗날 하위지는 숙종 때 복권되어 증( 죽은 사람에게 후에 관직을 내리는 일 )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