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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조선] 강희안의 출생및 관직생활과 집현전 학자였지만 꽃을 더 좋아했던 남자 그가그린 고사관수도

by yesjenny486 2025. 8. 7.

강희안은 조선 세종 시대에 활동한 집현전 학자이자 문신, 서예가, 화가, 시인입니다.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삼절(三絶: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인사람 )'로 불렸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인 양화소록은 조선 최초의 전문 화훼서로 평가받으며, 일본 원예학에도 영향을 미친 집현전 학자 강희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강희안 작품 과사관수도

 

 

 

 

 

강희안의 출생 및 관직생활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화가이며 1418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진주,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이다. 심온의 외손자이자 소헌왕후의 조카이며 즉 이모부가 세종대왕이었다. 자연스레 문종ㆍ세조 등 소헌왕후 소생들과는 내-외종 관계였으며 노사신과는 이종사촌 관계였다.  동생 강희맹(1424) 역시 형과 마찬가지로 글과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으며, 농서 금양잡록도 저술했다.  강희안은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동료 학자들과 각종 연구와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하지만 강희안의 명성은 시와 글씨, 그림 등의 예술 분야에서 더욱 높았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에서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추어 ‘삼절(三絶)’이라고 불렸으며, 특히 글씨와 그림에서는 당대에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던 예술가였다. 이와 같은 강희안의 예술적 재능은, 그의 아버지 강석덕과 동생 강희맹도 시·글씨·그림에 출충한 능력을 보였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직생활은  1441년(세종 23년) 과거에 급제했고 집현전에서 일했으며 1443년 신숙주, 정인지 등의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의 해석을 달았고 1445년 최항과 함께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달았다. 1447년 이조정랑이라는 직위에 올랐으며 1454년(단종 2년)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고 1455년(세조 1년)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서예와 글짓기에 뛰어나서 당대의 누구도 강희안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1455년 강희안의 서체를 바탕으로 <을해자>라는 금속활자도 만들어졌는데 <을해자>는 임진왜란 전까지 사용되었으며 <갑인자> 다음으로 조선에서 오랜 기간 사용된 금속활자였다. 1460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 감찰사, 1462년 사은부사, 1463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강희안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양화소록>이 있으며 서예와 글짓기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데에도 뛰어났는데 강희안의 대표적인 작품이 <고사관수도>이다. 1464년 사망했다.

 

 

 

집현전 학자였지만 꽃을 더 좋아한 남자 

 

강희안의 시는 당대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당대인들의 평을 검토해 보면, 대체적으로 그가 담박하고 평이하면서도 우아하고 법도에 맞는 시풍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강희안의 시는 그의 동생 강희맹이 편찬한 『진산세고』에 66제 171수가 수록되어 있다. 강희안의 글씨는 진나라의 왕희지나 원나라의 조맹부에 비견될 정도였으며, 특히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조선 초기의 학자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강희안과 정난종, 그리고 자신의 형인 성임 등 세 사람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였다. 강희안의 글씨는 조정에서도 뛰어남을 인정받았는데, 이는 국가적인 필사 사업에 강희안이 항상 참여했던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세종대와 세조대에는 금이나 은으로 불경을 필사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빌거나 소원을 비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때마다 강희안이 필사자로 참여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446년 3월에는 집현전수찬 이영서와 함께 성녕대군의 집에서 금으로 불경을 필사했고, 1450년(세종 32) 1월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미타관음경을 필사했으며, 4월에는 서거한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추진된 불경 필사에 참여하였다. 이밖에 강희안은 1445년(세종 27) 국왕의 어보 중 하나인 소신지보[국새]를 제작할 때에 그 인문을 전서로 썼다. 또, 세조대에 새로 금속활자를 주조할 때도 강희안이 글씨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을해자이다. 강희안은 그림에 대해 동시대의 학자 서거정은 송나라의 화가 유용과 곽희의 묘를 체득했으며 또 스스로 깨달은 묘법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강희안이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 산해관에서 만났던 주사 양거는 강희안에게 얻은 단찰을 보배처럼 여기면서 상자에 넣어 간직했다고 한다. 또, 그는 강희맹을 통해 강희안의 시를 얻은 일이 있었는데, “글씨와 시 두 가지가 모두 절묘하다.”라고 하면서 강희안의 시와 글씨를 극찬하였다. 강희안의 작품으로 문헌상에 남아 있는 그림의 제목들을 보면 그는 주로 산수·인물·화훼·초충등을 주로 그렸고, 특히 묵화로 대나무·매화·난 등을 즐겨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안의 「행장」에 따르면, 강희안은 서화는 천한 재주이며 후세에 유전되면 단지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후대에 전해지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그 결과 강희안의 탁월한 능력과 명성에 비해 그의 작품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강희안은 출세하여 명성을 얻는 것보다 날마다 글을 읽고 꽃을 키우는 일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강희안은 직접 쓴 『양화소록』의 서문에서 자신이 조회에 참석하거나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때를 제외하면 항상 꽃을 키우면서 소일했다고 하였다. 또, 강희안이 꽃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친구들이 진귀한 꽃을 선물로 주었고, 그 결과 강희안은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화훼를 소장할 수 있었다. 강희안은 화훼를 기르면서 직접 터득한 재배법과 또 중국 문헌을 통해 습득한 화초 재배법 등을 종합 정리하여 하나의 책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바로 『양화소록』이다. 『양화소록』은 원래 독립된 저술이었으며, 대략 1449년(세종 31) 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강희맹이 1473년(성종 4) 경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형 강희맹의 시문을 종합·정리하여 『진산세고』를 편찬하면서 『양화소록』을 『진산세고』의 마지막 권 4에 수록하였다. 『양화소록』의 내용을 보면, 맨 앞에 강희맹의 서문과 강희안의 자서가 있다. 이어 본문은 정원을 꾸미는 식물 16종과 괴석 등 모두 17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되어 있다. 꽃과 나무를 화분에서 재배하는 법, 화분을 배열하는 법, 종자나 뿌리를 보관하는 법 등 원예에 관한 다양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종이에그린 수묵화로  23.4*15.7cm의 작은 사이즈이다 지금은 국립박물관 소장하고 있는데 엽서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인물산수화로 묘한 매력과 평안한 느낌이 있는 작품이다. 자연을 먹과 물로 그려낸 전통산수화도 나름의 멋이 있지만, 인물까지 담겨 있는 이 그림에는 인간 내면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하다. 작품 중심에 있는 선비는 바위의 차가움도 잊은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다. 엎드린 자세로 맑은 계곡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복잡한 삶에 대해 관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흐르는 물을 보며 미소 짓는 순수한 표정에서 선비는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동그란 얼굴선과 간결한 이목구비는 강한 먹과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하였고, 넓은 옷자락은 짧고 강렬한 움직임으로 그려내 그림 속 선비가 정갈한 성품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비가 엎드려 있는 바위는 농묵(먹을 충분히 갈아서 사용하는 진한 먹색)과 중묵(물과 먹의 양이 비슷한 정도의 중간 먹색)의 번짐을 적절히 사용해 거친 돌의 질감뿐 아니라 자연의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선비의 자태와 흰 의복은 진한 먹으로 그려 거친 바위 덩어리와 흑백대비를 이루는데, 이를 통해 당대 사대부 화가들의 필력과 세련된 화법을 짐작할 수 있다. 오른편 뒤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절벽의 옆선과 아랫부분에 있는 진한 먹색의 강렬한 바위선은 이들이 오랜 세월을 그곳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왼편의 여백과 공간 구성은 보는 이가 인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농묵, 중묵, 담묵(먹보다 물의 양이 많은 흐린 먹색)의 조화로움은 몇 안 되는 잎사귀와 가늘고 날렵하게 늘어진 가지, 작은 바위틈에서 자라난 풀을 살아 숨 쉬게 한다. 그리고 그 틈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빠른 붓놀림으로 그려 경쾌함까지 더한다. 이런 먹선의 여유로움에서 문인들과 함께한 수묵화의 발전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