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시간을 측정하는 데 사용된 대표적인 기구인 앙부일구와 자격루는 작동 방식과 활용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앙부일구는 해의 움직임을 이용한 해시계로, 해가 떠 있는 동안만 시간을 알 수 있는 반면, 자격루는 물의 흐름을 이용한 자동 물시계로, 날씨와 관계없이 시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자격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격루를 만든 이유
자격: 스스로를 타격한다. 루 : 물시계 즉 , 스스로 시간을 알리는 물시계란 뜻
자격루는 세종시절에 만들어진 물시계로써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타종 장치를 갖춘 세계최초의 기계적 장치 중 하나다.
지금의 현대사회는 정확한 시간을 기반으로 1분 1초를 다투며 살아가지만, 그 시절 옛사람들은 해, 달, 별에 의지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경에 종사했던 시절에 의식주를 넘어 시간 측정 까지도 자연에 의지하였던 것이다. 날씨가 나빠서 해, 달, 별의 움직임이 평상시와 다를 때에는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동원하여 시간의 흐름을 파악해야만 했다. 당시의 시간관념을 살펴보면 우선 하루는 12시(十二時, 子時부터 亥時까지)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해가 지고 뜨는 시각을 기준으로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라는 시보(時報, 시간을 알려줌) 제도가 시행되었다. 저녁 9시 즈음(2경)의 인정 때는 28번의 종을 울렸고, 새벽 4시 무렵(5경 3점)의 파루 때에는 33번의 북을 쳤다. 이는 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계절마다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별도로 밤에는 시간을 초경(대략 오후 7시∼9시), 2경, 3경, 4경, 5경(대략 오전 3시∼5시)으로 나눴다. 여기서 1경은 다시 5점(點)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연 현상에 의거하여 파악한 시간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통일된 하나의 시간을 알려줄 수 있는 시계가 필요했는데 원래 자격루 이전에 '누기’라는 물시계가 먼저 제작된 바 있었다. 1424년(세종 6)에 세종은 중국의 체제를 고찰하여 궐내에 경점(밤 시간의 단위)을 알리는 기구를 구리로 주조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옆에 사람이 지키고 있다가 떠오르는 잣대 눈금을 읽어서 시간을 알려주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착오가 많았다. 게다가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실수하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했다. 그리하여 장영실과함께 만든 것이 자격루이다.
자격루의 원리
자격루는 중국의 누각법(漏刻法)과 수시력(授時曆) 등을 참고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안되었다. 물의 흐름과 여러 기계적 장치를 이용하여 시간을 자동으로 측정하고 알리는 장치인데 그 원리를 보면 다음과 같은데 그림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가능해 첨부하겠습니다.
자격루의 핵심은 일정한 수위의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야 하는 데 있다. 자격루 상부에는 물이 고여 있는 큰 물통이 있고 이 물통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물이 일정한 속도로 아래쪽의 수평 막대를 지나 흐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자격루는 물시계와 시보장치로 구성되었다. 즉, 아날로그 물시계와 디지털 시보장치의 결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시계는 12시를 측정하였고, 시보장치는 12시와 밤의 5 경점을 알려주었다. 자격루의 핵심은 자동 시보가 가능한 장치가 있었다는 점인데, 자시(子時)부터 해시(亥時)까지 시간마다 종을 한 번씩 울렸다. 그리고 밤에는 경마다 인형이 북을 치고, 점마다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했다. 작동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선 크고 작은 파수호 4개에서 물이 흘러내리면 원통형인 수수호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유압을 일정하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2개의 수수호에 하루를 12시 100각으로 등분한 부전을 각각 넣었다. 수수호 2개를 번갈아 사용했는데, 수수호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서 일정 눈금에 닿게 되고, 거기에 있는 지렛대 장치인 방목(方木)을 건드려 그 끝에 있는 쇠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그 쇠구슬이 떨어지면서 동판의 한 면을 치면, 동력이 전해져서 나무로 된 인형 3개가 종, 북, 징을 쳐서 시보장치를 움직인다. 그리고 나무인형 둘레에는 12 지신 인형을 배치하여 각 시각을 알리도록 했다. 해당 시간이 되면 종이 한 번 울리고 나서 십이지 인형이 등장하는데, 그 인형은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두 시간 동안 전시되었다. 언제든지 시간을 파악할 수 있게 한 조처였다.
국보 제229호 자격루
1434년 장영실이 제작한 조선의 대표적인 물시계 '자격루'는 하루 오차가 2.4분에 불과할 정도로 정확도가 높았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국가표준시계 역할을 했다.
자격루는 1433년(세종 15)에 장영실蔣英實) 등이 완성하였고, 그 이듬해인 1434년(세종 16) 7월 1일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격루는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지어 작동시켰기 때문에 보루각루(報漏閣漏)라고 불렸으며, 궁궐 내에 있어서 금루(禁漏)로도 칭해졌다. 그러나 장영실이 만든 것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자격루는 1536년(중종 31)에 세종 대의 것을 개량한 것이다. 파수호(播水壺, 물을 담아 다음 항아리로 흘려보내는 항아리) 3개, 수수호(受水壺, 물을 받아서 부표와 잣대를 띄우는 항아리) 2개의 물통만 남아있어 원래의 완벽한 모습은 아니다. 수수호에는 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중종 대 제작에 참여한 인물의 이름 등이 새겨진 명문이 있다. 파수호에는 ‘가정병신 6월 일조(嘉靖丙申六月 日造)’라는 명문을 통해 1536년의 제작 연대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국립고궁박물관에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는 잣대와 부전(浮箭, 浮子, 수수호 안에 띄우는 살대)이 소장되어 있다.
세종 대 이후에도 자격루가 사용되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거나 개보수가 잘 행해지지 않은 모습이 여러 차례 확인된다. 단종 대에는 자격루나 보루각을 개수하는 작업이 잘 진행되지 않았고, 관련 기술을 아는 사람도 한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1469년(예종 1)에 자격루를 다시 설치하여 사용했는데, 예전과 달리 정확도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
경복궁의 자격루는 점차 낡았고, 보루각은 비가 샜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보루각이 창덕궁으로 옮겨졌다. 1536년(중종 31)에는 새 보루각이 창경궁에도 세워졌다. 보루각도감이 설치되었고, 도제조에는 김근사, 김안로가 임명되었다. 난관 김수성은 공사를 전담하였고, 자격장, 박세룡 등이 제작을 맡았다. 이 자격루의 일부가 지금 덕수궁에 전하고 있는데, 2018년부터 문화재보존과학센터에서 보존처리와 분석조사를 시행한 결과 수수호 왼쪽 상단 명문이 드러나서 당시 참여한 도감의 관리와 장인들의 명단이 모두 확인되었다. 이처럼 자격루와 보루각의 보수는 꾸준히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에도 보루각도감을 두어 보수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보루각개수의궤』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소실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