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는 강우량의 분포를 측정하던 기구로서 세계 최초 통일된 강우량을 재는 기계다. 이는 유럽보다 약 200년 앞서서 만들어졌으며 당대 조선의 과학기술력을 짐작할 수 있는 증거이다. 세종은 왜 측우기를 만들게 되었을까??
측우기를 만들게 된 이유 와 활용
조선시대는 농업이 중심인 시대였기때문에 하늘을 잘 알아야 풍작이 들어 풍요로운 삶을 살 수가 있었다. 측우기를 만들게 된 진짜 이유는 농사를 잘 짓기 위함만은 아니었고 농업 생산량 예측과 조세 부과 기준 마련을 위해서 정확한 강우량 측정을 통해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각 지역별 농작물 피해 정도를 파악하여 공정한 세금 부과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세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재량권을 남용하여 농간을 부리는 폐단이 답험에서 발생하므로 이를 배제하기위하여 공법을 만들었고 군현단위 연분 9 등법을 도입하였다. ( 연분이란?? 조세의 징수를 위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고을 따위로 세율을 정하는 것 ) 많은 조세를 걷기 위해서는 농사가 잘 되어야 하는데 수리시설이 부족했던 조선시대의 풍흉은 강우량에 잘 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측우기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왕은 궁궐 안에 있으면서 어떻게 각 고을의 연분의 적정성을 알 수 있었을까? 바로 전국에 8도 334개의 군현에 설치된 측우기로 측정한 강우량을 수령들의 보고하면 그것을 증빙자료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답험손실법은 관리들이 논밭에 직접 나가 개인별 수확량을 조사하여 손실을 감안하여 세액을 정한 다음 조세를 징수하였다. 하지만 공법은 관리들이 논밭에 직접 나아가서 개인별 수확량을 조사하여 세액을 결정하는 과정을 생략하는 대신 수령이 자기 고을의 여러 해 평균 수확량을 고려하여 해당 연도의 연분을 산정하고 그것을 감사의 재심을 걸쳐 임금에게 보고하면 조정에서 논의하여 연분을 확정하였다. 확정된 연분을 고을에 내려 보내면 수령은 개인별 결수에 연분세율을 곱하여 조세를 징수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기에 강우량이 연분의 결정하는 가장 객관적인 자료였고 강우량의 측정을 전국적으로 통일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측우기는 더욱더 규격화되었다.
측우기 원리
측우기는 3단 구조로 분리해서 만든 후 하나의 원통으로 연결해 사용하였습니다. 측우기의 3단 구조는 비가 조금 내려 맨 아랫부분에 고였을 때 윗부분을 들어내고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분리하여 만든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합니다. 또 측우기가 원통인 이유는 하늘에서 비가 떨어질 때 측우기 모서리가 각져 있으면 물이 튀어 양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며 같은 둘레라도 원형으로 된 그릇이 물을 더 많이 담을 수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측우기는 빗물을 받는 그릇인 "측우기"와 측우기를 세우는 "측우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처음 만든 측우기는 높이 41cm 지름이 16cm인 원통형이었지만 그 통을 채울 만큼 비가 많이 오는 날이 없어서 높이 30cm 지름 14cm 정도로 줄여서 다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측우기 밑에 있는 사각기둥 모양의 측우대는 측우기가 땅에서 어느 정도 위로 떨어져 있도록 해서 빗물이 튀어 들어가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빗물이 고이면 추적 (자 )으로 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측우기가 사용되기 이전에는 농기구를 이용해 비가 온 정도를 가늠했습니다. 문헌을 통해 메마른 땅에 빗물이 스며든 깊이를 호미가 들어간 정도, 쟁기가 들어간 정도로 보고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온 후 젖은 흙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은 토양의 종류와 성질, 건조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는 정확한 강우량을 측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측우기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국보 제329호 공주충청감영 측우기
측우기는 조선 세종 23년 (1441년 )에 만들어진 후 여러 차례 다시 만들어졌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헌종 3년 (1837년)에 만들어진 금영측우기가 유일하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천문지리기구이다. 1971년 12월 21일 금영측우기(錦營 測雨器)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었다가, 문화재청에서 2019년 12월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금영측우기를 좀 더 순화된 표현인 '공주감영 측우기'로 명칭을 변경하고, 2019년 현재 보물로 지정된 측우기와 측우대들을 국보로 승격지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2020년 2월 27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329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국보 승격 직후까지는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위치한 기상청에서 보관하다가, 2020년 국립기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대중에 전시되고 있다.
국보 제329호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는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것으로, 측우대는 없고 측우기만 전해오고 있다. 조선시대 충남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錦營]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공주 감영에 보관되어 있다가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유지(和田雄治)에 의해 발견되어 1915년 일본 기상청에 옮겨졌으나, 1971년에 대한민국으로 반환되었다. 2012년 3월 20일, 반환 이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예상되지만, 지금까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세종시절 여러 이유로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현재에 이르러 다시 돌아보면 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측우기가 제작된지 570년이 지났지만 현재 빗물의 양을 재는 방법이 그 시절과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인데 세계기상기구(WMO)에서 규정한 크기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빗물만 받을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측우대를 사용했던 점과 현재 세계 각국 우량계의 지상고도가 75cm에서 150cm라는 것과 비교하면 조선 시대 측우기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는지 놀라지 않을수 없고 유럽의 경우 1639년 갈릴레의 친구이자 제자인 이탈리아 수학자 "카스텔리"가 최초로 우량 기를 만들어 강우량을 측정하였는데 15세기 조선의 측우기는 유럽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게 세종대왕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럽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