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천재 수학자며 천문학자인 김담 그의 천문학에 관해서는 지난 30년 동안 석사논문 3편과 박사논문 2편이 나왔고 논문이 20편쯤이나 편찬될 만큼 그이 업적을 높이 사고 있다. 오늘은 김담의 생애를 알아보고자 한다.
김담의 탄생 및 업적
조선 초기의 천재 수학자며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1416~1464)은 1416년 음력 11월 29일경북 영주에서 부인 김소량과 모인 평해 황 씨 사이의 3형제의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撫松軒),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조부는 고려시대 중랑장을 지낸 김로(金輅)이다. 부는 현감을 지낸 김소량(金小良)이고, 모 평해 황씨(平海 黃氏)는 고려 때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독서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등과 함께 『홍무정운』을 번역하고『역대병요』를 편찬하기도 한 형 김증(金曾)에 이어 현달함으로써 집안 가세를 일으켰다. 그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였던 장영실과 처남 매부 사이로 세종 17년인 1435년에 19세 어린 나이에 형 김증과 함께 문과 정시 병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후에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봉상시 판관 이순지가 간의대에 나가 천문학을 관측하던 중 어머니가 상을 당하자 그 일을 대신 맡아보기도 했다.
집현전학사로 있으면서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특히 천문과 관측 분야에 뛰어나 간의대로 발령받아 이후 간의대에서 활약하게 되었으며 1433년(세종 15년)에는 17세에 세종의 영을 받아 이순지와 함께 달력 연구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는 이순지와 함께 해와 달의 기울음을 연구한 뒤 원나라의 접시력, 명나라의 대통력을 종합하여 조선의 달력 『칠정산』내편을 간행하였다. 이후 세종대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 이순지, 이위, 장영실 등과 함께 간의 규표, 앙부일철, 자격누등의 천문 관측 기구를 개발하게 되었다. 김담은 천문·지리·풍수등에 두루 박식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성삼문, 신숙주, 장영실, 정인지 등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다. 그 뒤 다시 중시(重試)에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김담은 나이 25세에 전료(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일하는 관료) 와 더불어 국어와 음의(한자의 음과 뜻)를 보정해 올렸다. 28세 때에는 봉상시주부가 되었고, 이듬해 정인지, 이순지, 박윤장 등과 함께 경기도 안산에서 양전을 시행했다. 29세 때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제언종사관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 공사(제방이나 뚝을 쌓는 공사 )에서 계산을 맡았다.
1434년(세종 16년) 이조정랑이 되고, 그해 제언종사관( 제방 공사에서 계산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 )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에 참여하여 계산을 맡았다.
김담의 업적 그리고 마지막
1437년 승문원부교리가 되었다. 승문원부교리로 있을 때, 명을 받아 토지를 측정 연구하여 토지분할 정책인 전부구등지법을 찬정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다.
1437년 집현전 저작랑을 거쳐 1439년 정 7품인 집현전박사가 되었다. 그해 이순지와 함께『칠정산외편』을 교정해서 올렸다. 그 뒤 세종대왕의 명으로 정인지, 정흠지, 정초등과 함께『수시력법』과『대통력태양태음통궤』등에 대하여 그 계산법을 밝히고, 약간의 수정을 가해서『칠정산내편』을 만들었는데,『칠정산내편』과『태양통궤』·『태음통궤』등이 모두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편찬본의 규장각판 사본만이 현재 전한다.
1443년 28세에는 봉상시 주부에 임명되어 양전을 실시하였다. 1444년 29세에는 호조 정랑과 이조 정랑에 임명되어 경기도 안산 지방의 양전( 농지를 조사·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을 실시하고, 제언종사관으로 언제 공사의 계산을 담당했다. 1447년 32세에는 문과 중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승문원 부교리에 임명되었는데, 왕명으로 전부구등지법(토지를 9등급으로 나누어 조세를 부과)에 관여했다. 1448년에는 서운관부정( 서운관의 정직책을 보좌하는 종4품 벼슬 )이 되었고, 이듬해인 1449년에는 친상을 당하였으나 계속 출사 하여 역법과 측후의 일을 하였다. 1451년에는 사헌부장령이 되어 불사를 배척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그는 박팽년, 하위지 등과 교분이 있었는데 이들을 만나 시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이 후일 문제가 되어 비판거리가 되기도 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이 1455년에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자 중앙 벼슬을 피하여 자청하여 안동부사, 충주목사등의 외직으로 나갔다. 충주목사 재임 중에는 정사에 밝고 송사를 잘 다스렸다. 특히 관내에 도적들이 들끓어 백성들이 불안해하자 도적들을 색출하고 형벌을 엄히 적용해 치안을 안정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신망을 받았다. 1456년 이후 안동부사로 나갔다가 예조 참의를 거쳐 1458년 경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그의 사위 이수형은 단종 양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는데, 그와 긴밀히 교류하였다. 이수형은 장인의 고향인 영주 도촌으로 낙향하였다.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있던 매월당 김시습과 자주 만나 동병상련의 정을 달래며 신라의 고적을 중수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당시 세조가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리며 두 번씩이나 불렀으나 사양, 승정원일기에는「사판삼신이 일」로 기록되어 있다. 서거정과도 교유하였는데,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봉명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거정 등이 오자 감사와 함께 그를 환대하며 고적 정비에 나서는 것으로 시름을 달랜다 하였다. 세조 7년인 1461년 46세에는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고, 1463년 48세에는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며 1464년 49세에는 중추원사( 조선 시대 중추원의 정2품 관직입니다. 중추원은 고려 시대부터 존재했던 관청으로, 조선 시대에는 군사 기밀 및 왕명 출납을 담당했습니다. 중추원사는 그 중추원의 최고 관직 중 하나)에 이르렀다. 문하에서는 이수형 등을 배출했는데, 이수형은 그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김담은 세조 10년인 1464년 음력 7월 10일 향년 48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있다. 유족으로 아들 김만칭과 손자 김우가 있었다.
별 보는 남자 김담
김담의 일화 하나를 보면 세종이 재위하는 동안 황금시대를 여는 원동력이 되었던 집현전에서 근무하게 된 김담은 추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어서 빨리 학문을 연마하여 선배들 못지않은 업적을 쌓아서 나라에 공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예서 뭐 하느냐?”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김담은 살짝 놀랐다. 책 읽는 데 집중하느라 누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몰랐던 것이다. “형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친형 김증(金曾)이었다. 지난해 김담이 정시(庭試)에 병과로 급제했을 때 맏형 김증도 함께 합격하여 형제가 나란히 집현전 정자(正字: 정 9품)로 임명되는 겹경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집현전 학사 중에서 형제가 나란히 선발된 것은 김담 형제가 유일했다. “춥지 않느냐?” //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김담의 얼굴은 벌겋게 얼어 있었다. 김증은 동생의 얼굴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옵니까?” // “승정원에서 자네를 찾네. 어서 가보게.” // “승정원에서요?”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곳으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과도 같은 기관이었다. 태종 때부터 왕권 강화시책을 펼치면서 승정원의 정치적 영향력도 덩달아서 커졌다. 그런데 그 막강한 승정원에서 이제 관직에 오른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은 말단관리 김담을 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네가 별을 보는 걸 좋아하는 김담이냐?”
승정원으로 찾아간 김담을 맞이한 도승지는 대뜸 그렇게 물었다. 도승지의 입에서 동료들끼리 재미 삼아서 부르는 자신의 별명이 나오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김담은 이내 “예” 하고 대답했다.
쉬는 시간에 집현전 동료들끼리 잡담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취미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른 사람은 시 짓기나 붓글씨 쓰기가 취미라고 했는데 김담은 ‘별을 보는 게 취미’라고 했다. 김담의 말에 동료들은 박장대소를 터트렸고 그때부터 김담의 별명은 ‘별 보는 남자’가 되었다. // “어째서 별을 보는 걸 좋아하게 되었느냐?”
도승지는 김담의 별명을 화제로 질문을 이어갔다. 김담은 이 대화가 조금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하늘 같은 도승지 앞에서 답변을 피할 수는 없었다.
“어릴 때 소피가 마려워서 한밤중에 깨어나 측간에 가던 중에 우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별들이 당장 쏟아져 내릴 것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뒤에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머리를 식히려고 잠시 밖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 별들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것처럼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별이 좋아져서 틈이 날 때마다 별을 관찰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김담의 대답에 도승지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알았다. 돌아가서 어명을 기다리고 있거라.”
며칠 뒤, 김담은 간의대(簡儀臺)에서 근무하라는 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