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 사육신 단종복위 모의 실패와 사형과 후일담 그리고 뿔뿔히 흩어진 가족들의 거취

by yesjenny486 2025. 8. 10.
반응형

 

 

 

사육신은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켰습니다. 충절을 지킨  여섯 신하를 육신이라 하며 훗날 살아있는 생육신과 비교하게 위해 사육신이라 불리었다 한다. 

 

사육신 위패가 있는 사당

 

단종 복위 모의와 실패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의 계유정난을 통하여 그의 동생인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 3공 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소설 육신 전에는 한명회가 이를 막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세조가 친히 운검을 취소시켰고,  이들의 계획이 일단 좌절되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복위 음모의 전모를 밀고하여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스스로 이들을 문초하였다. 일단 문초과정에서의 연루자의 언급 순서는 김질의 입에서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가 언급되고, 먼저 끌려온 성삼문에 의해서 박팽년과 유성원, 박쟁이 추가된다(음력 6월 2일). 여기에 공조참의 이휘가 스스로 관련되었으나 미리 말을 하지 못했다고 자백하러 오면서 박중림과 권자신이 추가된다. 이후 박팽년을 문초하면서 김문기, 성승, 송석동, 윤영손, 박팽년의 아버지가 추가된다. 그리고 국문 이후 발언을 보면 최득지, 최치지, 박기년, 박득년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고 며칠 후(음력 6월 7일) 성삼문과 권자신의 입에서 단종 연루 사실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망한 인물로 허조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후에도 사육신과 연결되었는 이유로 머릿수가 늘어나서 결국 70여 명이 된다. 실록에는 국문 때의 기록을 보면, 그저 심문과 답변 위주로 기록되어 있으나 육신 전에는 국문장에서 사육신이 세조를 디스 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이 내용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애초에 배경이 되는 기록이 남효온의 전기소설 육신 전이므로 실제 사실일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전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내용에는 전혀 없다. 그나마도 왕이 직접 국문한 건 첫 국문 정도로 이후로는 구치관이 국문한다. 실록은 기록 자체가 짧고 별게 없다. 기사 자체가 두어 편 있는 데다가, 사육신의 반항이 묵비권 정도에 그치는지라 의외로 순순히 다 부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사육신들이 세조의 국문에 대해서 왜 이렇게 술술 자기 자신들이 하려고 했던 단종 복위 추진에 대해서 다 순순하게 얘기하는지를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이들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이 단종을 복위시키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속 마음을 숨길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육신의 사형과 후일담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박중림·성승·유응부·박쟁·권자신·윤영손·송석동·이휘·석을중·아기지·불덕 은 작형을 당한 후 군기시 앞에서 백관들이 지켜보던 가운데 거열형을 당하였다. 박팽년은 고문 중에 사망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 사당에서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박팽년과 유성원의 시신 또한 거열형을 당했다. 거열형을 당한 이들은 3일간 효수되었는데, 어두운 새벽을 틈타 생육신의 한 사람이던 김시습 이 이들의 시신을 수습, 한강을 건너 노량진에 이들의 묘를 만들게 된다. 이 묘는 사육신묘의 시초가 된다. 또한 사육신의 가문들은 모두 풍비박산 나서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 당하고  모친과 딸, 처첩, 조손, 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의 노비로 이 중에서 나이 16세 미만은 외부에 보수라고 하여 보증인이 신분을 보증하는 조건으로 방면하였다가 나이가 되면 위리안치하게 하였다. 나중에 연결된 이들의 친자로 15세 미만의 경우도 보수하였다가 관노가 되게 된다. 이때 관련된 부녀들의 상당수는 대신들의 노비로 넘어갔고, 그들의 전지의 상당수 역시 대신들에게 넘어간다. 이외에 이미 결혼한 부녀의 경우는 별로 손을 대지 않아, 이미 시집가 있던 딸들은 화를 면했다. 직계 후손이 살아남은 것은 박팽년과 하위지뿐으로 박팽년은 손자 박일산, 하위지는 살아남은 조카 중 한 명인 하원이 하위지의 양자로 입적해 대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직계를 제외한 친족들은 10여 년을 노비로 살아가다가 세조가 승하하기 이틀 전에야 사면을 받아 원래 신분을 회복했다. 특히 박일산이 살아남은 것은 정말로 천운으로 이것에 대한 이야기로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위지의 가문은 미성년자였던 조카 하분, 하포, 하원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고 대신 변방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성삼문의 경우를 보면 아들들은 물론 조카들과 종손들까지 모두 처형당해 직계가 단절되었으니 그나마 나은 경우다.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청의 기생, 관비로 분배되었다. 공신의 한 사람인 권람은 자신의 5촌 조카딸인 권영금을 분배받는 식으로 일부 친족에게 정속 된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공신가에 종과 노리개로 분배되었다. 사육신은 절개를 지키다 죽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대부분 공신들에게 겁탈당했거나, 공신의 첩이 되거나 아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절개를 지키지 않고 공신의 첩이 된 여성들을 비판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었지만, 사육신 가문의 아내와 딸 중 공신들의 성노리개로 겁탈당한 여성들의 기록은 실리지 않았다. 그중 박팽년의 형수로 봉석주의 첩이 된 윤 씨는 윤연령의 딸이며, 후일 선조 때의 형제 정승 윤근수, 윤두수 형제의 증대고모가 된다. 윤 씨는 난신에 연좌된 부녀자들의 존재가 언급된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던 여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봉석주의 첩이 되기를 자처한 것 등만 문제시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 가족들의 거취

 

실록에 기록된 사육신 가족들의 거취이다.세조실록 5권, 세조 2년 9월 7일 갑술 4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한다라고 되어있다.  의금부에 전지하 기를, 난신에 연좌된 부녀 내에 이소동의 아내 천비, 이공회의 아내 동이, 심상좌의 아내 미비을개·딸 계금은 계양군 이증에게 주고, 이담의 아내 소사, 박기년의 아내 무작지, 이오의 딸 평동, 이유기의 누이 효전은 익현 군 이관에게 주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 김승규의 아내 내은비·딸 내은 금·첩의 딸 한금은 영의정 정인지에게 주고, 조청로의 어미 덕경·아내 노비, 최득지의 아내 막덕, 이현로의 첩의 딸 이생은 좌의정 한확에게 주고, 이현로의 아내 소사, 민보창의 아내 두 다비, 김유덕의 아내 금음이·딸 옥시는 우의정이사철에게 주고, 성삼문의 아내 차산·딸 효옥, 이승로의 누이 자근아 지는 운성 부원군 박종우에게 주고, 황보흠의 아내 석을금, 박쟁의 아내 오덕·딸 효비는 좌찬성 윤사로에게 주고, 이유기의 아내 설비·딸 가구지·말비·막금, 성삼고의 아내 사금 및 한 살 된 딸은 우찬성  정창손에게 주고, 이승윤의 아내 가은비, 지화의 아내 막금은 파평군 윤암에게 주고, 이휘의 아내 열비, 허조의 아내 안비·딸 의덕은 전 판중추원사 이계전 에게 주고, 이자원의 아내 유나매, 이개의 아내 가지는 우참찬 강맹경에게 주고, 이윤원의 첩 분비, 이경유의 아내 효생은 판중추원사 이징석에게 주고, 박인년의 아내 내은비, 정효강의 아내 보배는 화천군 권공에게 주고, 원구의 아내 소사, 고덕칭의 아내 보금·딸 신금은 우참찬 황수신에게 주고, 이해의 아내 종금·딸 불덕·불비, 김유덕의 누이 막장은 예조 판서 박중손에게 주고, 최면의 누이 선비, 조완규의 아내 소사·딸 요문은 병조 판서 신숙주에게 주고, 이석정의 아내 소사, 권자신의 아내 어둔·딸 구덕은 중추원 사 권준에게 주고, 우직의 아내 오대, 김현석의 아내 영금은 이조 판서 권람에게 주고, 윤영손의 아내 탑이·딸 효도, 이반경의 첩 막생은 중추원 사 박강에게 주고, 김문기의 딸 종산, 최득지의 첩 지장비는 대사헌 최항에게 주고, 성삼성의 아내 명수, 정효강의 아내 효도·딸 산비는 병조 참판 홍달손에게 주고, 성맹첨의 아내 현비, 최사우의 첩 옥금은 판내시부사 전균에게 주고, 심신의 아내 석정·딸 금정·은정, 성승의 아내 미치는 계림군  이흥상에게 주고, 이의영의 아내 효생, 조극관의 아내 현이는 도절제사 양정에게 주고, 박순의 아내 옥덕, 박헌의 아내 경비는 이조 참판 구치관에게 주고, 송창의 아내 소앙지, 황보석의 아내 소사는 전 예문 제학 윤사윤에게 주고, 이 말생의 아내 관저·딸 경비, 김문기의 아내 봉비는 도절제사 유수에게 주고, 박대년의 아내 정수, 송석동의 아내 소사는 동지중추원사  봉석주에게 주고, 김승규의 딸 숙희, 권저의 어미 보음미는 동지중추원사 강곤에게 주고, 박계우의 아내 소비, 김승벽의 아내 효의는 예조 참판 홍윤성에게 주고, 류성원의 아내 미치·딸 백대, 이명민의 아내 맹비는 좌승지 한명회 에게 주고, 황선보의 아내 복중·딸 덕비는 우승지  조석문에게 주고, 이호의 아내 개질지·딸 목금은 첨지중추원사 유하에게 주고, 윤처공의 딸 숙비, 정원석의 아내 만금은 이조 참의 원효연에게 주고, 최치지의 아내 미치, 최윤석의 아내 봉비는 단천 군수 최유에게 주고, 황선보의 누이 소사, 이유기의 딸 소근소사는 형조 참의 황효원에게 주고, 조번의 아내 소사·딸 의정, 황의헌의 아내 복비는 병조 참의 한종손에게 주고, 원구의 누이 심이, 조완규의 딸 가이는 좌부승지  윤자운에게 주고, 윤위의 아내 소사, 정관의 아내 신경은 우부승지 한계미에게 주고, 이의산의 딸 소사·막금은 경상도 관찰사 조효문에게 주고, 이정상의 아내 삼비·딸 현비·정비, 최득지의 아내 마배는 겸 판통례문사 이극배에게 주고, 윤경의 아내 소사, 성삼빙의 아내 의정은 판종부시사 권개에게 주고, 봉여해의 어미 소비·아내 정순은 상호군 유서에게 주고, 민보흥의 아내 석비, 이윤원의 아내 대비는 판군기감사  김질에게 주고, 대정의 아내 자근, 하위지의 아내 귀금·딸 목금은 지병조사 권언에게 주고, 이보인의 아내 물재·딸 옥석은 성균 사성 정수충에게 주고, 조완규의 누이 정정, 최사우의 어미 소사는 상호군 유사에게 주고, 식 배의 딸 귀비·귀장·귀금·소근비, 유응부의 아내 약비는 예빈시 윤  권반에게 주고, 민신의 아내 우비·딸 산비는 대호군 안경손에게 주고, 이지영의 어미 석을금·아내 종비·딸 은비는 대호군 홍순로에게 주고, 송녕의 아내 소사, 권저의 첩 복가이는 대호군 조득림에게 주고, 김감의 첩 귀덕·딸 소비, 이양의 아내 월비는 대호군  이극감에게 주고, 중은의 누이 귀덕·딸 귀비, 장귀남의 누이 말 비는 직예문관 유자황에게 주고, 정분의 아내 순비, 이석정의 첩 말생·딸 감물은 대호군 임자번에게 주고, 대정의 어미 내은이, 김감의 아내 소사 ·딸 복금·말금·아지는 전 호군 김처의 에게 주고, 최면의 어미 소사·아내 점물아지·딸 부허비는 사복 소윤 한서귀에게 주고, 최치지의 아내 덕비·딸 백이는 전농 소윤  송익손에게 주고, 이승로의 아내 효정·딸 숙화, 이오의 아내 소질지는 군기 부정 설계조에게 주고, 이의산의 아내 참군·딸 아을금은 사재 부정  권경에게 주고, 정관의 어미 소사, 장귀남의 누이 학비는 군기 부정 홍순손에게 주고, 허조의 어미 화산·누이 소근소사는 겸 군기부정 곽연성에게 주고, 권저의 아내 계비·딸 순비는 호군 최윤에게 주고, 조순생의 아내 가질비, 김선지의 아내 내은이·딸 가야지는 전 부사직 이몽가에게 주고, 이석정의 딸 감상, 최면의 누이 막비는 도승지 박원형에게 주라. 하였다. 본인들은 절개를 충신으로 절개를 지켰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고통스러운 날들이었을 것이니 참으로 슬픈일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