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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대왕의 해시계 정남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by yesjenny486 2025. 7. 11.

 

 

 

 

 

 

세종 때 만들어진 해시계로는 천형일구 · 앙부일구· 현주일구· 정남일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모두 소실되어 앙부일구 외에는 그 모양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세종대에 각종 관측 기구를 만들면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의 해시계를 같이 만든 듯하다. 둘 다 받침대가 6촌 3분으로 휴대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좌측상단 정남일구 우측상단 현주일구 하단 천평일구

 

정남일구

 

세종 때에는 여러 가지 해시계가 제작되었는데 그 정남일구는  비교적 복잡한 구조를 가진 것의 하나로 임진왜란 때 소실로 인해 유물은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왕조실록등에 기록으로 설명은 상세히 남아 있다.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지남침 같은 부수적인 장치가 없어도 남쪽을 정할 수 있는 구조이다. 남쪽을 가리켜주는 해시계라는 뜻으로 ‘정남일구’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해 내려 오는 기록을 기반으로 오래전부터 니덤 등의 과학사 학자들이 복원도를 제시한 바 있고, 최근에는 국내 천문학자들이 복원했다. 그 구조는 크게 사유환(四遊環)과 지평환(地平環)이라 이름 붙여진 둥그런 고리 둘, 사유환에 붙어 있는 망통인 규형(窺衡), 그리고 지평환에 비스듬하게 붙어 있는 반호형의 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평환은 북쪽과 남쪽에 있는 두 개의 기둥에 지탱되어 고정되어 있으며, 사유환은 지평환의 내부에서 남북의 천구 축을 중심축으로 360도 회전한다. 이 사유환에는 상하로 움직이는 망통이 달려 있어, 매일 달라지는 해의 고도를 상하로 움직이며 관측한다. 사유환의 밑 부분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 그 밑으로 시반의 눈금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정남향을 맞추는 기능은 사유환에 달려 있는 망통을 가지고 한다. 즉,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태양의 고도에 망통을 상하로 움직이면서 맞춘다. 이때 망통에 달려 있는 규형에 태양이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정남일구의 방향을 맞추면 그것이 바로 정남향이 된다. 이와 같이 정남향을 맞춘 후 사유환 밑바닥의 네모난 구멍 밑에 있는 시반의 눈금을 읽으면 그것이 바로 관측 당시의 시간이 된다. 받침대의 길이는 1척 2촌 5분인 것을 보아 휴대용은 아니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길이단위: 1척은 약 30cm , 1촌은 약 3cm , 1분은 약 3mm이다 

 

현주일구 

 

1437년(세종 19) 4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작자는 분명하지 않은데, 다만 1432년 세종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대제학, 정초와 함께 천문의기(天文儀器)를 만들도록 명한 사실로 보아 정인지와 정초, 이천등이 제작과정을 전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주일구의 시간 측정 원리는 실의 그림자가 시반면에 맺히게 되면 시반면에 새겨진 눈금을 읽어서 측정하게 된다. 하절기에는 앞면에 그림자가 맺히게 되어 앞면의 눈금을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고, 동절기에는 뒷면에 그림자가 맺히게 되어 뒷면으로 시간을 측정한다. 조선시대 시계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앙부일구만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현주일구는 전혀 전해지는 바가 없어 그 모양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더욱이 현주일구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세종 때 유일하게 만들어진 창작품인데, 다행히 그 모양이 기록으로는 남아 있어서 대략이나마 그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현주일구는 사각형의 휴대용 해시계로 크기가 6촌 3푼밖에 되지 않는다. 평평한 바닥 북쪽에 기둥을 세우고 남쪽에는 못〔池〕을 팠으며, 북쪽에는 십자(十字) 표지를, 그리고 기둥머리에 추를 달아서 아래쪽 십자와 서로 닿게 하여 시계가 수평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시반(時盤) 중심 한가운데에 지름이 3촌 2푼인 작은 원을 그려 100각(刻)을 표시해 두었다. 100각을 그린 것은 당시의 시제(時制)가 1일(日)은 100각이라는 데에 따른 것이다. 100각이 그려진 원〔小輪〕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있어 한 가닥 가는 실을 꿰어서 위는 기둥 끝에 매고 아래는 밑바탕 남쪽에 매어 실 그림자가 있는 것을 보고 시각을 알 수 있게 하였다. 흐린 날에는 시각을 알기 어려우므로 행루(行漏)를 만들었는데, 행루는 파수호(播水壺)와 수수호(受水壺) 각각 하나씩이 있었다. 현주일구란 명칭이 붙은 것은 수평을 잡기 위해 매달아 둔 추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현주일구는 대단히 휴대하기 간편한 시계라고 하겠다. 자오를 정확히 하기 위해 지남침주1과 함께 사용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세종 때 여러 개의 현주일구를 만들어 양계에 나누어 주고 남는 것은 서운관에 보관했다고 한다.

 

천평 일구 

천평일구(天平日晷)는 적도시반(赤道時盤)을 가진 휴대용 해시계이다. 1437년(세종 19) 4월에 만든 것으로 전해지나, 그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작자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432년에 세종  예문관 제학 정인지 에게  대제학 정초와 함께 천문의기(天文儀器)를 만들도록 명한 사실로 보아 정인지와 정초, 이천 등이 제작과정을 전담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천평일구는 현주일구와 구조가 거의 비슷하다고 하는데, 다만 현주일구가 시반(時盤) 북쪽 편에 기둥이 세워진 데 반해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또한 현주일구가 북쪽 기둥머리에 추를 달아서 아래쪽 십자 표시에 닿게 하여 수평을 유지한 데 반해, 천평일구는 기둥머리에 노끈을 꿰어 그것이 남쪽을 가리키게 하였다. 그리고 현주일구가 남쪽 한 곳에만 못〔池〕을 판 데 비해 천평일구는 남쪽과 북쪽 두 군데에 못을 파고 그 한가운데다 기둥을 세웠다.‘천평’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수평을 더욱 잘 유지하기 위해 두 개의 못을 판 것으로 짐작된다. 이 외에도 현주일구와 마찬가지로 시반 한가운데에 100각(刻)이 표시되어 있는 작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100각을 표시한 것은 당시의 시제(時制)가 1일은 100각이라는 데 따른 것이다. 크기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현주일구가 6촌 3푼인 것으로 볼 때, 거의 비슷한 크기였을 것이다. 천평일구는 “말을 타고 가면서도 시각을 알기 위해 만든” 시계였음이 특히 강조되고 있다. 때문에 다른 해시계들에 비해 가장 이동하기 편리한 휴대용 시계였으며, 군대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