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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도 신임했던 정치적 동반자 소헌왕후의 탄생 및 가슴아픈 아버지 심온의 죽음

by yesjenny486 2025. 7. 3.

 

 

세종대왕의 업적은 수많은 역사 기록으로 쉽게 알 수 있지만 소헌왕후의 존재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세종이 좋은 왕으로 남을 수 있었던 데는 그 옆에서 묵묵히 조력자의 역할을 잘 해내며 남편의 치부조차 이해하며  포용해 준 소헌왕후의 희생 덕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한편에 있는 소헌왕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조선최고의 왕비 세종대왕의 정실부인 소헌왕후

 

 

소헌왕후의 탄생 

심덕부의 아들 심온과 (순흥 안 씨 가문) 안천보의 딸 사이에서 1395년 10월 30일  경기도 양주목 심온 사저 ( 지금의 양주시)에서 태어났다.  소헌왕후의 친할아버지 심덕부는 고려말 문하시중이었는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며 삼촌 심종은 이방원의 왕자의 난을 도와 태종의 왕위 계승에 도움이 된 인물이다. 소헌왕후는 어린 시절 이러한 이유로 조선의 개국에 휘말려 있던 본가를 떠나 외할아버지 안천보의 집안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 안천 보는 고려에서 면직당한 후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벗어나 지방에서 가야금과 책을 벗 삼아 살았으며 너그럽고 후한 성품으로 주변의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책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또한 이런 성품이 좋았던 안천보를 보고 자란 소헌왕후였기에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편안하게 즐기면 되는 셋째 아들 충녕의 배우자로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소헌왕후의 숙부 심종이 태조의 사위가 되면서 왕가와 긴밀한 인연이 있던 터라  1408년이 되던 해야 심온의 장녀인 소헌왕후와  왕자 충녕 군과 혼인을 하게 되는데 그때 나이는 충녕보다는  2살 연상인 14살이었으며 혼인 후 10년간 왕자의 비였지만 첫째 양녕의 망나니 짓으로 생각지도 않은 셋째 충녕 군이 세자가 되면서 경빈에 책봉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2남 2녀의 만삭의 몸으로 왕비가 되면서 조선시대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아버지 심온의 억울한 죽음 

세종과 소헌왕후 슬하에는 8남2녀가 있다. 문종, 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이며 세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여인으로써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왕비로서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왕비가 되자마자 맞이한 것은 아버지 심온의 죽음이다. 소헌왕후가 왕비가 되자마자 태종의 명에 의해 아버지 심온은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1418년 "강상인의 옥사"가 발생하는데 강상인은 원래 태종의 측근으로 군사를 총괄하는 병조참판을 맡고 있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아직 국정경험이 부족한 젊은 왕을 뒷받침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에 관련된 업무인 병권과 주요한 국가 중대사는 본인이 처리한다는 조건을 달았었다. 이 상황에서 강상인은 고의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군사 관련 보고를 태종을 건너뛰고 세종에게만 보고를 하였는데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하여 태종은  격분했고 이로 인해 몇 달간의 국문 끝에  강상인 , 박습 등의 관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강상인이 죽기 전 극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하는데 배후에 심온이 있었다는 내용이었고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가있던 심온은 대역죄인이 되었으며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아내와 자식들은 천인으로 삼고 재산도 몰수하였으며 심온의 도움으로 관직을 받거나 친밀한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파면 및 처벌을 받았다. 더 나아가 심온의 형제와 그 가족까지도 관직에서 파하고 귀양을 갔으며 관노로 전락하거나 관로가 막히는 등 집안이 한마디로 풍비박산이 나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소헌왕후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벗으려 해도 관련된 이들이 모두 죽었으니 왕후 또한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역적의 자식이 된 소헌왕후를 폐위하자는 상소가 많이 올라왔지만 태종이 이를 막은 것으로 전해진다. 1442년 태종이 죽으며 남편 세종이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줄 거라 내심 기대하였지만 세종시대에는 복권되지 못하고 아들 문종시대가 되어서야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왕비의 자리와 아버지의 목숨을 바꾼 꼴이 되었으니 소헌왕후의 마음은 어땠을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세종도 신임했던 정치적 동반자 소헌왕후

 

소헌왕후가 이끌었던 내명부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안정적이었다. 세종시대 내명부에는 후궁들도 많았다. 그중 세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신빈 김씨는 자녀를 8명이나 낳았는데  소헌왕후는 신빈 김 씨와 별다른 잡음이 없었으며 오히려 차남 수양대군과 막내 영응대군의 양육까지 김 씨에게 맡길정도로 후궁들을 잘 이끌고 큰 문제없이 내명부를 통솔한 것을 봐서 왕비로서의 역할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알 수 있다.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안 고사는 소헌왕후가 안쓰러워서 그런지 세종은 더욱더 극진히 대해주었으며 왕실에서 왕후의 위상을 높이는데 힘썼다. 또한 세종은 왕비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으며 자신이 부재일 때 왕비의 명에 따라 일처리 할 것을 이르기도 했다. 1426년에 세종이 잠시 궁을 비운사이 한양에 큰 불이 났다. 이때 소헌왕후는 왕실의 어른으로써 남편을 대신해 조성을 통솔하며 화재 진압에 앞장섰다. 세종도 왕후에게 모든 결정권을 위임했으며 신속한 대처로 화재진압은 물론 왕실의 종묘를 지켜내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를 보면 소헌왕후는 조용히 남편만 보필하는 수동적인 여성이 아닌 나라의 큰 위기도 지켜낼 수 있는 강단 있는 리더의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세종도 이러한 왕후에게 예로써 존중했다. 세종실록에 보면 " 왕후가 나아오고 물러날 때 전하께서 반드시 일어나시니 그 공경하고 예하심이 이와 같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를 보면 세종이 왕비 소헌왕후를 대하는 공경의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세종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가슴 아픈 비극을 겪어야 했던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소헌왕후에게 부부관계 이상을 넘어선 '동지애'를 느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왕후로써으 화려한 삶보다는 아픈 현실들을 가슴 속애 담아두고 인내해야 했던 시절을 보낸 소헌왕후는 1446년(세종 28)에 병이 깊어져서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능은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으로, 나중에 세종과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