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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대왕의 탄생 그리고 셋째아들 충녕이 왕이 될수 있었던 이야기 및 세종대왕의 자녀들

by yesjenny486 2025. 7. 1.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중 이분은 민족의 스승으로 여겨져 세종대왕의 탄생일인 5월 15일은 지금의 스승의 날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4대 국왕이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함께 한국사에서 대왕의 칭호를 가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와 더불어 조선의 과학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인물로 남아있습니다. 

 

조선4대 국왕 세종대왕

 

세종대왕의 탄생 

조선의 초대 국왕 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 정안 군이었던 태종 (이방원)과  정녕옹주였던 원경황후의 셋째 아들로 1397년 5월 15일 한성부 준수방 장위동 본궁 (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에서 태어났다. 태종은 이미 세 아들을 요절한 경험이 있어 정녕옹주의 친정인 민제집 안에서 양녕대군을  홍영리의 집안에서 효령대군을 키웠으나 막내인 충녕만 직접 길렀다. 어릴 때부터 떡잎이 달랐던 충녕은 단군이래 최고의 독서광이라 알려져 있다. 병을 앓고 누워있을 때도 책을 읽으려 만 들어 건강을 염려한 태종이 책을 모조리 압수했으나 병풍뒤에 몰래 숨겨놓았던 구소수간이라는 책 한 권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이야기는 아름아름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조선은 장자계승으로 왕위를 물려주던 시대라  왕이 될 수 없는 셋째 아들인 충녕의 이러한 재능이 아까워 태종은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으며 덕분에 학문은 물론 수석까지 섭렵하게 되었으며 1408년 12살이 되던 해 충녕 군으로 봉해졌고 4년 뒤 1412년 충녕대군으로 진봉 되어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생활이 다양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왕이 된 후 세종은 조선의  법제, 의례, 음악, 지리학, 역사학, 언어학, 천문학, 군사학, 기계공학, 농학, 의학의 발전 및 백성의 복지 군사력강화뿐만 아니라 영토까지도 넗힌 조선이라는 나라의 수준을 몇 단계씩 끌어올린 천제적인 군주로 1450년 4월 8일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애민청치로 백성을 사랑했던 왕 백성들에게 진정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던 왕으로 대왕이라는 수식어가 당연하게 느껴지는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남았으며 세종실록을 통해  그 업적이 후대에 전해져 오고 있다.

 

셋째 아들 충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

아버지인 태종은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차지해 왕통을 바로 세우려고 했지만 자식이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계승의 원칙을 버려야만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양녕대군 (장남)을 왕위에 올리려 했으나 계속되는 망나니 짓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장남이 아닌 이상 차남인가 삼남인가는 중요하지 않았고 택현 (어질고 현명한 이를 택한다 )만 남았는데 둘째 효령대군은 부처를 받드는 선비 즉 불가에 뜻이 있었다. 술을 하지 못해 태종의 눈밖에 났다는 얘기도 있지만  "애가 순둥순둥하기만 해서 무슨 말을 해도 그냥 헤헤 웃고만 있다"라는 얘기가 있는 걸 보니 태종의 마음속엔 일처리도 똑 부러지게 못하며 사신 앞에서 술 한잔 받아넘기지도 못하는 융통머리도 없는 애를 어찌 왕이 자리에 앉히느냐였을 것이다. 반면에  셋째 아들 충녕은 어릴 적부터 똑똑하고 남달랐던 터에 중신들 또한 전폭 신뢰를 했다는 게 기록에 남아있다. 사실 양녕대군에게 장남 순성군이  있었으나 문제는 양녕대군이 사망이 아닌 살아생전에 패세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버지를 제치고 세손이 되는 셈이 되니 입장이 곤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의견과 왕이 되더라도 사후문제로 양녕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하는 점도 중신들의 고민거리였으니 태종의 마음 또한 복잡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두 달여 만인 태종 18년 (1418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양위하였으며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 4년 (1422년 )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다 사망하였고 태종이 사망한 이후 세종은 진정한 조선의 국왕이로 자리 잡으며 위대한 업적들을 세워 나갔다.

 

정실부인 소헌왕후와 세종대왕의 자녀들

 

소헌왕후 심씨는 조선의 4대 국왕 세종대왕의  아내로 유명하다. 조선 왕비의 롤모델로 꼽힐 만큼 후대까지 존경과 사랑을 받은 소헌왕후는 세종대왕과  금슬도 좋았는데 그래서인지  8남 2녀를 슬하에 두었다. 사이가 좋았던 터에 세종은 후궁을 들이는 시기가 상당히 늦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아들을 낳은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18남 7녀 )

 

소헌왕후 8남2녀 장녀/ 정소공주  , 장남/ 문종 , 차녀 /정의 공주 , 차남 /세조 (수양대군) , 3남 / 안평대군 , 4남 / 임영대군 , 5남 / 광평대군 , 7남 / 금성대군 , 8남 /평원대군 , 15남 /영응대군 
영빈강씨 1남 6남 /화의군 
신빈김씨 6남2녀 9남/계양군 , 왕녀(조졸) , 10남/ 의창군 , 왕녀(조졸), 12남 / 밀성군 , 14남  / 익현군 , 17남 / 영해군 ,18남 / 담양군
혜빈양씨 3남 11남/  한남군 , 13남 / 수춘군 , 16남 / 영풍군 
상침송씨 1녀 3녀 / 정현옹주
사기차씨   왕녀 (조졸)
숙원이씨 1녀 4녀 / 정안옹주    

 

 

최근 문종을 제외한 세종의 왕자들의 태를 묻은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을 조사한 결과  19번재 아들인 "이당"의  태실이 발견되었는데 태실기록에는 1442년 7월 24일 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446년 이전에 요절하여 봉군 되지 못해 기록에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날의 기록이 없고 왕실 족보인 선원보에도 이당에 대한 기록이 없어 추후 후대에서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이외에도  귀인 박씨/ 귀인 최 씨/ 숙의  조 씨/ 숙용 홍 씨 / 사기 차 씨 등 5명의 후궁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