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 수표의 구조 및 도성민 삶의 중심지였던 수표교 왜 청계천이 아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는지 알아보자

by yesjenny486 2025. 7. 24.

 

 

 

측우기를 사용해 강우량을 측정하는 방법 외에  하천의 수위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비가 오면 하천의 수위가 올라가고, 가물면 하천의 수위가 내려간다는 자연현상에 주목한 방법이다. 1441년(세종 23)에는 측우기의 제작과 함께청계천과에 수표(水標)를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수표의 구조 

 

1441년(세종 23) 지금의 청계천 마전교 서쪽 수중(水中)에 박석(薄石)을 놓고, 그 위를 파고서 받침돌도 개를 설치한 다음 가운데에 사각형의 나무기둥을 세웠다. 그런 후 쇠갈고리로 받침돌을 고정시키고 나무기둥 위에 척(尺), 촌(寸), 푼 [分]의 눈금을 새겨 수표를 설치했다. 그리하여 비가 올 경우 호조의 낭청( 조선시대, 중앙에 두었던 정 3품 당하관부터 종 6품까지 해당하는 관직 )이 수표로 가서 빗물의 깊이를 살핀 후 보고하였다. 한강변 암석 위에도 수위를 알 수 있도록 수표를 세우고 척·촌·푼의 눈금을 표시하여 강의 수위를 측정했다. 한강변의 수위는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 나루터를 관리하던 종 9품 벼슬 )이 수표로 물의 깊이를 측량하여 호조에 보고하였다. 지방의 경우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각 고을 관청에 강우를 측정할 수 있는 그릇을 놓고, 수령이 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게 하였다.

이처럼 세종대에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가 전국적으로 설치되어 관리되었는데, 이때 설치된 수표는 나무로 제작된 것이다. 나무의 경우 제작이 용이하지만, 물속에서 쉽게 썩기 때문에 성종대에 이르러 석표로 교체하였다. 『신 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수표교의 서쪽 수중에 석표(石標)를 세우고 척·촌의 수를 새겼다”라고 하는 것에서, 나무로 만든 세종대 수표가 1481년(성종 12) 이전 돌기둥으로 개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수표는 1833년(순조 33)에 화강암으로 제조된 것으로 중부 장통방에 있다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다. 1985년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었다. 1441년(세종 23) 청계천 마전교에 수표를 설치한 이후 마전교는 수표교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수표교는 설치 초기에는 흙이나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이후 석교로 개조되었다. 현재는 장충단공원으로 이전되었다.

 

 

도성민 삶의 중심지 수표교 

 

수표교 주변은 서울의 동서대로인 종로거리와 시전이 인접한 중심지였다. 또한 영희전으로 가는 통행로였기 때문에 어가( 조선시대에 왕이나 왕세자가 타던 가마의 한 종류 )가 지나가는 중요한 다리였다. 영희전은 태조, 세조, 원종 등 역대 왕들의 어진( 왕의 초상화 )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전각으로, 숙종대에서 정조대의 경우 숙종, 영조의 어진도 봉안하여 궁궐 안 선원전과 함께 도성 내외에 어진을 봉안하는 공식적인 장소였다. 정조는 영희전에 정기적으로 전배하고 침향을 올렸을 뿐 아니라 다른 어진 봉안처보다 관리의 격식을 높였다.

수표교에서는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서울 사람들의 다리밟기가 성행하였다. 보름달이 뜬 후 서울사람들은 모두 종로거리와 청계천으로 나와 다리를 건넜는데, 이렇게 하면 다리에 병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정월 보름날 다리밟기를 하는 날이면 야간 통행금지도 해지되어 많은 사람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수표교는 많은 사람들의 통행로였기 때문에 포도청과 군문의 중요한 순라구역 중 하나였다. 따라서 순라 하는 군사들의 경수소( 조선시대 한성부의 치안 업무를 위해 설치된 최말단 관서 )가 수표교에 있었다.

이러한 수표교는 중부 장통방( 조선시대 초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400년간 역관들이 모여 살던 한양의 동네 이름으로서, 오늘날의 중구 관철동 )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북악산 쪽 신영동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이때 이전하는 과정에서 ‘무자금( 무자년 즉, 경진준천 이후인 1768년(영조 44)에 금위영에서 다리를 수리한 것을 의미 )’이 새겨진 귀틀석이 유실된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장충단공원의 수표교에는 ‘영개조( 개축한 해를 표시한 각자(刻字) )’, ‘정해개조’라고 새겨진 귀틀석만 남아있다. 이후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발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수표교가 놓였던 기초가 확인되었다.

 

 

청계천에 있던 수표교가 왜 장충단 공원에 있는 걸까?

청계천에는 많은 다리가 있다 그중 수표교는 폭 7.5m 높이 27.5 m  높이 4m이며 9개씩 5줄로 놓인 45개의 돌기둥에 지탱되는 긴 다리였다. 원래는 삼일교 아래인 청계천 2가 쪽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며 임시로 신영동으로 옮겼고 1965년에 장충단 공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서울시에서는 2030년 다시 원래자리로 옮겨올 계획이 있다고 하는데  800억이라는 비용도 문제이지만 노후화된 다리를 옮긴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진 않는다. 장충단은 어떤 곳일까?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순직한 홍계훈을 비롯한 여러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고종이 1900년에 세운 사당이다. 하지만 고종이 강제폐위되고 나라를 빼앗기면서 폐지되고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지게 된다. 가슴 아픈 역사이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의해 공원으로 지정되며 벚꽃놀이 명소가 되었고 1932년 상해사변당시 죽은 육탄삼용사의 동상을 세우는가 하며 이토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도 장충단에 수표교가 놓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청계천의 주요 지천이 그려진 18세기 중반의 도성대지도에 의하면  수표교 놓인 위치가 남소문동천이라는 것이 확인되는데 남소문동천이란 남소영이 있던 남소문쪽에서 장중단을 지나 광화문 사거리에서 갈라져 하나는 국립의료원방향으로 가서 청계천으로 흐르고 하나는 이간수문을 지나 성밖에서 청계천과 합쳐지니 남소문동천은 청계천의 주요 지천이라는 것인데  터무니없지는 않지만 이유라 하기에는 정확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