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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이순지의 업적과 생애 세종의 신임을 받은 조선 최고의 과학자

by yesjenny486 2025. 7. 21.

조선의 천재 과학자이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순지. 그의 위대한 업적과 생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세종에게는 든든한 신하였으며 장영실에게는 하늘과도 같았던 스승님인 그가 지나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조선의 천재 과학자 이순지

 

 

이순지의 생애 

조선의 과학, 세종시절의 과학기술은 르네상스 시대인 황금기였다. 서양의 르네상스와  동시대 이기 때문에 "세종르네상스"라고도 부른다. 세종은 한글 창제와 더불어 천문학, 의학등 여려 분야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중 세계 과학사를 새로 쓰게 한 천문학자이며 조선의 과학을 이끈 대표적인 과학자 이순지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달력을 만든 주인공이다. 그의 업적은 단연 으뜸입니다. 이순지의 본관은  양성 . 자는 성보. 시호는 정평이다.

1406년(태종 6)  경기도 양성현 (지금의 안성시 )에서 아버지 이맹상과 어머니문화류 씨류자이 딸 사이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원시에 입격하고 동궁행수로 있다가 1427년(세종 9) 친시 문과에 을과 2등 1위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숭정대부(종1품 문무관의 품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종1품)에 이르렀다.
이전까지 조선은 명나라의을 받아들여 사용하였으나 오차가 심하고 사용이 불편하였다. 이에 따라 1433년 세종의 독자적인 역법을 발명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천 등과 함께 제작에 들어가서 1442년 조선의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해 냈다. 칠정산내편은 중국 역법, 칠정산외편은  아랍역법을 참조해 만든 것이다. 그를 통해 조선은 천체의 운행을  한반도의 땅과 하늘에 맞춰 계산하게 되었다. 장영실이 개발한 혼천의, 간의, 자격루의 제작에도 참여하였으며 수학에도 능해  토지 측량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세종의 신임을 받은 이순지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삼년상을 치르러 내려간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세종은 이순지에게 복직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순지는 "5살 때까지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해서 어머니께서  유모도 없이 저를 키웠습니다. 그런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벼슬  이 웬 말이십니까?" 라며 복직할 수 없는 이유를 담은 글을 올려 사양했다. 일단 세종은 이순지의 공백을 대체할 대체인력을 확보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이순지의 글을 윤허할 수 없다며 재차 복직명령을 내려 상중에 왕실로 들어와 다시 근무하게 되며, 훗날 이순지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기복을 명한다.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는 자리에 앉은 능력 있는 신하라는 특성상, 그리고 세종이 이 분야에 관심을 크게 갖고 있던 터라 정승급 신하도 아니건만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마다 기복 명령을 받은 특이한 기록. 실제 세종실록 75권에 보면  세종이 명한 말이 전해지는데 

"봉상 판관(奉常判官)  이순지가 상시로 간의대(簡儀臺)에 근무하여 천문을 측후했는데, 지금 어머니 상사(喪事)를 만났으니, 여러 사람이 이순지를 대신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 만약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나는 마땅히 그 사람을 기복(起復)시켜 임명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기는 대체(大體)에 관계되는 사람이 아니면 기복 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지금 내가 간의(簡儀)에 뜻을 두는 것이 지극하니, 강의가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천재 과학자 이순지, 이천, 장영실의 업적은 모두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세종실록만 보아도 세종이 얼마나 과학에 진심이었는지 그리고 그 인재들을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세종은 과학 기술이 국가와 백성을 위한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으며 천문, 기상, 농업,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고  과학자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들의 연구 성과가 조선 사회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도록 독려했다.

 

 

이순지의 직급

1406년(태종 6) 서울에서 태어나 1465 년(세조 11) 6월 10일 60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이 씨 가운데 그리 많지는 않은 양성이 씨였다.  승문원 교리와 승정원  좌부승지, 중추원 판사등을 지냈다.

이순지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 산 5번지에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인 영월 신 씨 와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이순지의 부인은 영월 신 씨는 신한의 딸로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이 부이고, 차남은 이지이며, 삼남은 이공이다. 사남은 이 파이고, 오남은 이포이며, 육남은 이국이다. 1녀는 김구석의 처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는데, 사방지라는 사노를 끌어다 놓고 수를 놓는다는 핑계로 10년간 밤낮을 함께 했다. 이를 알게 된 사헌부에서는 이순지가 가족을 다스리지 못했다며 파직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세조는 특별히 추국 하지 말라고 하며 이순지에게 사방지를 주고 처리하게 했는데, 이순지는 다만 곤장 십여 대를 쳐서 다른 지역으로 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이순지의 딸이 몰래 사방지를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순지가 죽은 후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결국 의정부에서 세조에게 이 일을 아뢰니 세조는 사방지를 곤장에 처하고 신창현으로 유배했다.

승무원 교리: 외교 문서 작성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

승정원 좌부승지: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왕명 출납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

중추원 판사 : 국가의 중요한 정책과 관련된 결정을 논의하는 중추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관직

칠정산 편찬 참여 :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천문학 업적으로, 칠정산 내편과 외편을 완성하여 독자적인 역법 체계를 구축하는데 기여

간의대 관측 책임자 ; 세종이 창제한 간의대 관측을 총괄하며 천문 관측 및 연구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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