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시대의 과학발전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장영실을 빼놓을 수 없다. 장영실은 조선 전기의 과학자이자 기술자로, 노비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세종 시대에 활약했습니다. 물시계 자격루, 해시계 앙부일구, 측우기 등 다양한 과학 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며 조선 과학기술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장영실의 탄생
장영실의 할아버지 장 서는 송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 신경위대장군을 지냈으며 현재 우리나라의 충남 아산시 인주면 문방리에 터를 잡았다. 고려 예종에게 장서가 아산에 와있다는 소식이 알려져 조정에서는 아산의 일부 지역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아산군에 봉했으며 장 서를 시조로 한 후손들이 본관을 아산으로 하였다. 후손 중 4세손 숭(崇) 자께서 고려 의성군 김용비의 따님을 배필로 맞이하여 의성 원유동에 시거 하게 되었고, 8 세손 성길, 성발, 성휘, 성미, 성우 5형제가 의성군 점곡면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고려시대 전서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경북 의성군 점곡면 송내 2리는 오전서가 나온 마을로 유명하다. 장영실의 부친과 숙부 4명 전부가 과학기술부 장차관에 해당되는 전서를 역임하였으나, 조선개국 시에 역적으로 몰려, 장영실이 노비가 되었으나, 고려말 과학기술에 관해서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인재였었다. 고려의 공신으로 조선개국으로 인한 멸문이 된 집안에서 노비가 되다 보니, 세종실록에는 경상도 동래현(현 부산광역시)의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관노비 출신이다라고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출생시기는 1385~1390년으로 추정하고 있고 가마가 부러지는 사고로 파직이 된 후 행방이 묘현 하여 사망시기는 불명이다. 본관 역시 논쟁이 있어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장영실의 재주는 어릴 때부터 정말 뛰어났다 하나 신분 때문에 빛을 바라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친과 집안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재를 가여위 여기는 태종에 의해 등용되어 궁중의 기술자로 근무하게 되다 인재발굴을 중시했던 세종의 눈에 띄어 선진기술을 배워오라 명나라로 유학을 보내며 본격적인 실력을 발휘하며 간의,앙부일구,옥루 ,일성정시의를 제작하였다.
장영실은 과학자가 아니다
한국의 과학사학자들은 세종 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이순지와 이천을 꼽으며, 장영실이 이 시대의 '과학'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한 것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장영실이 갑자기 주목받은 것은 현대에 들어서인데, 한 예로 1921년에 잡 지 개벽에서 조선 10대 위인을 선정했을 때 과학 부문에서는 서경덕과이 꼽혔을 뿐이다. 무엇보다,장영실은 기술자이지 과학자가 아니다. 또한 발명가도 아니다. 여러 유용한 기구들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을 둘러싼 원리를 탐구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기구들과 관련된 사상적 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과학 기구들은 이천 등의 학자들이 설계한 것이고 장영실은 설계에 따른 제작만 담당했으며, 그 과학기구들도 기존에 이미 존재한 기구들로 새로운 기구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뛰어난 기술자는 맞지만 과학자는 아니며 발명가 역시 아니다. 학자들은 세종 대 과학을 논의할 때, 장영실보다는 오히려이천, 이순지, 김담, 정인지와 같은 인물에 더 주목한다. 천문학을 필두로, 다양한 자연 영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한 인물이 바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천 같은 경우, 혼천의나 앙부일구부터 각종 화약무기나 악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각종 기구를 만들어내는 총책임자였고 장영실 역시 그의 아래에서 제작을 도운 인물 중 하나였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세종시대의 과학을 떠올리면 당연지사 장영실을 이야기한다. 드라마에서도 장영실을 영웅시하는 내용으로 방영된 적도 있다. 시대적 배경과 노비라는 출신 때문에 여러 가지 설이 돌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 과학발전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던 건 사실이니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인 거 같다. 지금 충청남도 아산에 장영실 과학관이 있다.
장영실의 마지막은 기록에 없다
궁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던 장영실은 각종질병으로 고생하는 세종이 온천에 자주 갔는데, 장영실은 세종이 온천여행을 갈 때 타고 갈 어가를 제작하라는 명을 받고 어가를 제작했다. 이 어가도 비범한 것이 무려 내부인원이 직접 조종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가가 부서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이때, 같이 언급된 이들은 장영실, 임효돈, 최효남, 조순생이고, 장영실과 임효돈, 최효남이 처벌받았다. 이후 처분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장영실은 의금부에서 80대의 장형을 받고 파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 뒤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언제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다시 복직을 했는지 완전한 파직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장영실의 업적을 말살하기 위해 간의대 철거나 천문 기록을 삭제했다는 식의 음모론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아무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장영실의 나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처벌받은 인원 중에 유일하게 장영실만 복귀하지 못했는데, 상의원 별좌에 임명될 때 장영실의 나이는 이미 3~40대였다. 가마 사고 당시에는 환갑을 넘겼거나, 환갑이 다 되었을 텐데 조선시대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고령의 나이다. 다시 말해 처벌을 받고 물러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노환으로 죽었거나, 병세 등으로 복귀가 힘들었다 정도로 추정하면 앞뒤가 맞는다. 위의 실록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세종대왕은 가마 사고로 큰 처벌을 내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신하들이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도 난리를 쳐대니 결국 어쩔 수 없이 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당시, 신하들의 여론이 들끓어 잠시간 파직을 하거나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복직시키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 실제로 장영실을 제외한 인원들은 얼마 후 다시 복직을 한다. 딱히 장영실만 배제할 이유가 없는데 빠진 것을 보면 복직하기 힘들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출신 신분이 문제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미 면천된 지 한참이고, 20년이나 관직 생활을 한 인물을 이제 와서 신분 문제로 복귀를 못 시켜준다는 것은 별 근거가 없다.
조선 전기 기록은 후기 기록에 비해서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인해 소실된 것이 많아 부족한 면이 많은 데다 인물의 사망 시에 그동안의 행적을 요약해 서술하는 실록의 졸기는 조정의 고관대작 정도는 되어야 써주는 만큼 기술직 관료였던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부족할 수밖에 없고 사망에 대한 기사도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기록이 끊어졌다고 온갖 음모론과 억측을 만들어내는 게 지나친 일이다. 출신 내력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비 출신임에도 관직에 올랐고, 당대 인물 비중에 비해 현대에는 인지도가 상당히 높다 보니 그의 노년기 이력이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이 워낙 많아서 되지도 않는 음모론을 비롯해 온갖 설왕설래를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은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