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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집현전에서 일하려면? 문과 무과 잡과 그리고 집현전을 대표한는 학자들

by yesjenny486 2025. 7. 28.

집현전은 조선시대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현재의 개념으로 치면 국책 연구기관과 교육기관의 역할을 겸했던 곳입니다. 집현전에서 일하려면 기본적으로 학문적 소양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재여야 했습니다. 특히 과거 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후,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야 했습니다. 지금의 공무원이 되기 위한 과정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장원시험 풍경

 

 

 

집현전에서 일하려면 ?

 

집현전 학자들은 대부분 과거 시험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인재들이었으며 특히 문과 급제자 중에서 선발되었고 그중에서도 상위권 성적을 거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집현전에서 요구하는 학문적 수준은 매우 높아 경전과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해도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야 집현전에서 일할 수 있었는데 이는 왕이 직접 인재를 선택하고, 그 능력을 인정했다는 의미입니다. 집현전에서 일하기 위한 다른 방법은 이미 일하고 있는 집현전 소속학자들의 추천을 받는 경우인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동료 학자들의 신뢰를 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인 학자들은 단순히 학문적 지식만 갖춘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갖추어야 했는데 예를 들면 외교 문서작성, 역사기록, 정책 자문 또한 세종 때는 한글창제라는 임무를 수행했기에 폭넓은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왕의 측근에서 정책자문을 담당했기 때문에 왕의 신뢰는 물론 충성심과 성실함도 중요했던 곳입니다. 3년에 한 번 치러지는 과거시험 때문에 하늘의 별따기였던 급제 또한 그로 인해 대단한 인재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던 집현전 그러나 세조 1년 사육신 사건 이후 집현전은 폐지되었는데 성종 9년 (1478년) 예문관을 개편하면서 집현전의 기능을 일부 계승했습니다. 지금은 집현전이 존재하진 않지만 우리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관이었음은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시험 문과 VS 무과 그리고 잡과 

 

세종 시대의 과거 시험은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중요한 제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세종대왕은 인재를 중시하여 과거 제도를 통해 능력 있는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등용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조선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럼 과거시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크게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문과는 또 대과와 소과로 나뉘는데 대과는 초장에는 경학에 대한 이해도를 평가하는 강경(구술시험 ), 중장에는 시와 논술, 종장에는 대책 ( 현안해결능력)을 평가했고 소과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 초시에 합격해야 복시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무과는 무예와 신체조건을 평가하여 무반을 충원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장군들이 바로 무과에 합격한 공무원들인 것입니다. 잡과는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등으로 나뉘어 예조에서 주관했습니다. 아마도 이 시절에는 의술이 급속도로 발달하기 전이라  의과가 잡과로 분류되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험은 매년 있는 것이 아니라 3년에 한 번 실시하였고 이를 식년시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시험이 있었는데 이를 증광시라 불렀고 부정행위 방지를 위해 답안을 대리로 작성하거나 대리 필사. 청탁을 엄격히 급지 했습니다 양인 모두에게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과거에 합격만 하면 양반이 되어 출세를 할 수 있었다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평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어쩌면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과거시험 제도로 부단히 하층 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며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집현전을 대표하는 학자들 

 

조선 세조에 의해 폐지당하기 전까지 집현전은 수석인 장원 급제자가 16명, 2등이 6명, 3등이 11명, 4등이 7명 등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과거에서 5등 안에 합격하는 등 그야말로 조선의 최고인재들이 모여있는 기관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을 보자면  성삼문 (成三問):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하여 사육신으로 처형되었습니다 //  박팽년 (朴彭年):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며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사육신으로 처형되었습니다. //  숙주 (申叔舟):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 시대에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습니다. // 하위지 (河緯地):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 이개 (李塏):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 이석형 (李石亨):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습니다. // 정인지 (鄭麟趾):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  강희안 (姜希顔): 시, 서, 화에 능했으며, 훈민정음 해설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 정창손 (鄭昌孫): 훈민정음 창제 당시 반대했던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 외에도 최항 , 이선로 , 양성지 , 서거정 , 노사신 등 당시 천재들은 다 모여  있었다. 집현전의 가장 큰 성과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훈민정음 창제이다 하지만 세종의 주도하에 거든 것뿐이라 집현전의 업적이라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그러나 세종과 함께 많은 노력을 하였음에 그 공을 인정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