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成三問)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집현전에서 활동하며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사육신 중 한 명으로,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처형되었는데 오늘은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성삼문 출생
1418년 충청도 홍주 ( 지금 충청남도 홍성군 )에서 태어났다. 성삼문은 본관이 창녕으로 개성유후 성석용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성달생이고 아버지는 도총관을 지낸 성승이며 어머니는 현감 박첨의 딸이다. 성삼문의 이름이 특이한데 낳을 때 공중에서/낳았느냐?/ 라는 소리가 3번 들렸다고 한다. 3번째 질문에서야 비로소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에 이름이 삼문(세 번 물어봄)이 되었다는 기이한 설화가 전해진다. 장남이어서 동생들도 다 '삼'자 돌림이 되었고 성삼빙, 성삼고, 성삼성으로 이름이 특이하다. 부인으로는 아주 신 씨와 연안 김 씨 김차산으로 3남 3녀장남 - 성맹첨 ,차남 - 성맹년,3남 - 성맹종,장녀 - 성효옥 (사육신 처형당시 미혼으로 노비가됨 ),차녀 - 성씨, 3녀 - 성씨를 두었지만 병자사화 때 성삼문을 비롯해 동생들과 아들들, 하다못해 갓난아이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여 혈손이 끊어졌다. 성삼문의 부인 연안김씨가 성삼문의 제사를 지냈으나 부인이 죽은 뒤 서울에 살던 외손에게 전하여 외손인 박호[박증의 동생]가 봉행하여 왔다. 그러나 박호의 후손조차 끊어지면서 박증의 셋째 아들을 양자로 맞이하여 성삼문의 제사를 봉행하였고 후에 난리 등으로 성삼문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와 외손 내외의 신주를 인왕산에 묻었다. 1672년(현종 13) 신주가 발견되면서 송시열의 주관하에 홍성에 모셨다고 전한다. 사육신으로 병자사화 때 서울 새남터(현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 변 모래사장)에서 성삼문이 처형을 당하자 김시습이 시신을 수습하여 한명회의 압구정이 내려다보이는 노량진에 묻었다고 전해지지만, 언제 어떤 연유로 노량진에 무덤이 조영 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성삼문의 일지를 묻었다는 일명 ‘일지총’이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번지에 남아 있다. 뒷날 남효온이 『추강집』의 「육신 전」에서 대의를 위하여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성삼문의 높은 절의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성삼문의 관직생활
성삼문은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년 후인 1438년(세종 20)에 식년 문과에서 정과 19인(전체 29등)으로 급제하였다. 과거 급제 후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어 활동하던 성삼문은 1442년(세종 24)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 사가독서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주어진 특전 중 하나로,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정무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면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현재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가독서는 모두 세 차례로, 1426년(세종 8)과 1442년(세종 24), 1451년(문종 1)에 실시됐는데, 성삼문은 이 중 두 번째 사가독서에 선발되었다. 당시 성삼문과 함께 사가독서에 참여했던 집현전의 동료 학자들은 박팽년·신숙주·이개·하위지·이석형 등 6명이었다. 이들은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사가독서를 했는데, 성종대 학자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성삼문 등이 사가독서 기간 동안 학업에 매우 부지런했으며 서로 시문을 지어 주고받기를 쉬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가독서를 마친 후 성삼문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용재총화』에는 세종이 언문청[정음청]을 설치하고 신숙주와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제정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성삼문이 훈민정음 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성삼문은 1445년(세종 27)에 신숙주와 함께 운서에 관한 내용을 배우기 위해 여러 차례 요동에 다녀왔다. 당시 요동에는 음운이론에 정통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이 유배되어 있었는데, 성삼문 등은 바로 황찬을 찾아가 음운에 대해 배웠던 것이다. 또, 성삼문은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강희안·이개·이현로 등과 함께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과 범례를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으며, 1447년(세종 29)에는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의 편찬 사업에도 함께 하였다. 성삼문은 집현전 수찬으로 재직 중이던 1447년(세종 29)에 시행된 문과 중시에서 을과 1인, 즉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중시에서 처음에는 대책을 시험했는데, 20명이 합격했고 그중에서 8명이 우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문과 중시를 주관했던 고시관 들은 우등 합격자 8명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어렵다고 하면서 세종에게 직접 8명의 순위를 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세종은 우등 합격자 8명에게 「어제 팔준도」에 대하여 전·부·시·찬·명·송 중에서 임의대로 하나를 선택하여 짓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전을 지은 성삼문이 장원을 차지하였다. 당시 문과 중시에서 성삼문이 작성한 대책문은 그의 정치사상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대책문에서 성삼문은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고 법은 정치의 도구”라는 원칙을 전제한 다음, ①정권(政權)은 정부(政府) 대신에게 있어야지 대각(臺閣)에 있어서는 안 된다, ②사병(私兵)과 정방(政房)이 다시 설치돼서는 안 된다, ③ 대신에 대한 예우를 예에 맞게 해야 한다는 등의 국정 운영 방향에 관한 내용들을 서술하였다. 성삼문은 직집현전으로 있던 1450년(세종 32) 1월 신숙주와 함께 명나라에서 파견된 사신 예겸·사마순 등과 왕래하면서 이들과 운서에 관해 토론하였다. 예겸과 사마순은 모두 학자 출신의 관료였으므로 세종이 성삼문 등을 이들에게 보내 운서에 관해 질의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예겸 등은 성삼문과 신숙주의 학문과 문장을 높이 평가하면서 서로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고 시를 지어 수창(시를 서로 주고받으며 화답하는 것 )했다고 한다. 한편, 예겸이 조선에 다녀간 지 10년 후에 예겸의 제자인 장녕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성삼문이 이미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매우 아쉬워했다는 일화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전한다.
이성계의 팔준마를 소재로 찬문을 써서 1등으로 뽑힌 성삼문
세종 시절 이성계의 팔준마를 소재로 찬문을 써서 1등으로 뽑힌 적도 있었다. 이 때 신숙주와 다른 집현전 학사들도 찬문과 찬시를 썼지만 1등은 성삼문이었다고 한다. 내용을 보면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은 천 년의 운수를 맞히셨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 같은 것이 없으며, 신물(신성하거나 특별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물건 )은 한 시대의 재능을 바쳤기로, 감히 새 그림을 만들어서 예감(임금을 감동시키는 것 )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 오면, 왕자의 작흥(분발하게 함 )에 있어어도 역시 축산에 힘입어 성공하였습니다. 촉한(한나라)의 왕은 적로(말이름 )를 타고서 능히 단계(황해도 신계의 예지명 )의 액을 면하였고, 금(金) 나라 태조는 자백(赭白)을 타고서 곧장 흑수(黑水)의 깊은 물을 건너갔으니, 진실로 큰 업이란 돌아갈 데가 정해져 있사오매, 미물(微物)도 또한 그 힘을 분발하는 것이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옵서 용맹은 하늘에서 타고나시고 덕은 오직 날로 새로우시매, 고려의 운수가 끝날 무렵에 외부의 적이 자주 틈을 노리니 나라를 위하여 적개심을 품고 백성 보살피기를 상처 입은 것을 대하듯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의기(義旗)를 한번 돌이키자 백성은 화난을 면하게 되었고, 신과(神戈)를 사방으로 휘두르매 삼한(三韓)은 청명한 세상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근(遠近)이 지극한 인(仁)을 당적(當敵)할 길이 없었지만 근골(筋骨)은 먼저 크나큰 임무에 부지런하셔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시매, 몸은 상처에 피곤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당하여 세상에 이름난 인재만 용의 비늘에 붙어 절개를 다한 것이 아니오라, 기르는 짐승 같은 천물(賤物)까지도 제 몸을 바쳐 수고를 맡을 것을 알아서, 혹은 사냥터를 달리기도 하고, 혹은 싸우는 진중을 출입하여 주선(周旋)하는 데 힘을 다하고 걸음걸이는 사람을 따르는데, 그 크고 건장한 체격은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볼 만하고, 달리는 곳에는 앞설 놈이 없어 참으로 사생(死生)을 의탁할 만하더니, 마침내 그 장기를 발휘하여 큰 업을 이룩하는 데 도움 되었으니, 어찌 영걸(英傑)만이 유독 능연각(凌煙閣)에 오르리오. 권기(權奇)로 소릉(昭陵)에 참 열하게 된 것을 믿을 만하옵니다. 삼가 생각하 오면, 도(道)는 생성(生成)에 흡족하시고, 공은 조화(造化)에 참예하시고,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시고 선대의 일을 잘 기술하시어 삼가 수성(守成)만 하시고, 선대의 공을 계승하시고 선대의 정책을 드러내어 창업(創業)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며, 사랑은 견(犬)ㆍ마(馬)에게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는 돈(豚)ㆍ어(魚)에까지 미치며,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도찬(圖贊)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기술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온즉, 하물며 이 칭송이야. 바로 직분이옵기로 삼가 사적에 실린 것을 상고하고 겸하여 부로(父老)의 말을 채택하여, 화사(畵師)로 하여금 모형을 그리게 하고 졸한 글을 엮어서 공적을 기록했사오니, 터럭이 꼬부라진 한혈(汗血)은 완연히 당시의 용모와 같고, 늠름한 자태와 높은 공로는 거의 뒷사람의 안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상서로움은 하도(河圖)와 더불어 나란히 가고 노래를 지으면 천마가(天馬歌)를 누추하다며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한가한 틈이 나시 오면 한 번 보아주시옵소서. 그 덕을 칭찬하고 그 힘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선니(宣尼 공자(孔子))의 말씀을 따랐고, 아들에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길이 성조(聖祖)의 공을 살필 수 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