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빼어난 문인, 학자, 정치가였다.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활약한 그의 생애를 훑어보면, 학술, 문화와 정치, 외교의 중심에 위치했던 그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조선이 경국대전 체제를 통해유교국가를 완성시키고, 정제된 양반 문화를 꽃피우는 데 그는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는데 오늘은 신숙주의 업적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다.
집현전 학자 신숙주의 출생
신숙주는 태종 17년(1417) 6월 20일에 전라도 나주목 금안리 오룡동(현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반송마을)에서 아버지 신장과 어머니 나주 정씨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태종의 과거 동기이자 공조참의를 지낸 신포시, 할머니는 경주 김 씨로 김충한의 딸이며 증조부는 신덕린, 증조모는 정신호의 딸이며 고조부는 신사경이다. 부인은 무송 윤 씨인데 윤경연의 딸이자 윤회의 손녀, 윤소종의 증손녀이다. 부인과 사이에 9남 2녀를 두었는데 살펴보면장남 신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아내가 한명회의 딸이었다. 차남 신면은 신숙주가 가장 아낀 아들이었지만 이시애의 난( 함경도농민전쟁) 때 함경도 관찰사로 함경도에 파견되었는데 반란군에 악착같이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실록을 보면 "승지가 된 지 5년이 되었어도 실수가 없었으며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자못 자상하고 명확하였다." 하는 평을 받는 것을 보아 제법 촉망받는 인재였던 모양이다. 이때 신숙주는 세조의 의심 겸 견제 조치로 옥에 갇힌 참이라 아들의 죽음을 옥중에서 들어야 했다. 아들로 신용개가 있다. 신용개는 중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3남 신찬, 4남 신정은 작은형 신찬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였고 큰형 신주의 아들인 신종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판이 돌자 이를 시기해서 조카를 원수처럼 미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 본인 역시 신정을 두고 "우리 집안 말아먹을 놈은 바로 저놈이다"라고 고개를 내저었다고 하며 실록에서도 막장이라고 인증하고 있을 정도이나 아버지에게는 효자였다는 기록도 있다. 성종의 옥새를 위조하여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아 죽었는데 본인이 막장이기도 했지만 훈구파 영수의 자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성종의 훈구파 견제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5남 신준은 중종 때 좌찬성을 지냈다, 6남 신부, 7남 신형, 8남 신필, 장녀 신 씨 신명수(申命壽)의 처 , 9남(서자) 신결 , 서녀 숙원 신 씨 - 세조의 후궁, 손자 신광한 -고전에서 자주 회자되는 《기재기이》를 저술했으며 폐비 윤 씨의 외당숙이다.
신숙주의 술자리 일화들
1438년(세종 20)에 진사시 초시와 복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하였고, 곧바로 생원시에도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439년(세종 21) 국왕 친시 문과에서 3등으로 합격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특히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집현전 학사로서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외교와 국방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세조 즉위 후에는 그의 측근으로서 정국 운영에 참여하며 권력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 집안 대대로 술을 좋아하는 술꾼이었다. 서거정 의 <필원 잡기>에 등장하는 세조와 신숙주·구치관의 술자리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1463년(세조 9년) 세조는 영의정이던 신숙주와 새롭게 우의정이 된 구치관, 두 사람을 내전에 마련된 술자리에 불렀다.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 세조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내리겠다”면서 운을 떼면서 “신정승”하고 불렀다. 이에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틀렸다. 나는 새로 임명된 신정승(구치관)을 부른 것”이라며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이번에는 ‘구정승’이라 했다. 이에 구치관이 “예”라고 답하자 세조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으면서 “틀렸다. 나는 옛 구 자 구정승(신숙주)을 불렀다”면서 역시 구치관에게도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다시 ‘구정승’을 부르자 이번에는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틀렸다, 이번에는 내가 구정승(구치관)을 불렀다”면서 다시 신숙주에게 벌주를 하사했다. 이어 세조가 ‘신정승’ ‘구정승’을 교대로 불렀지만 이번에는 신숙주와 구치관이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는 “임금이 불러도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짐짓 꾸짖으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벌주를 내렸다. 이렇게 종일토록 벌주를 마셔 두 정승이 만취하자 세조는 크게 웃었다. 세조가 싱겁기 이를 데 없는 ‘아재개그’로 정승들을 곯린 것이다. 또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지는데 임금의 팔 비튼 신숙주이다. 비교적 술자리 실수에 너그러웠던 세조에게도 ‘역린’은 있었다. 세조 역시 때때로 마음을 풀어놓는 술자리를 신료들의 충성을 시험하는 자리로 여겼다. 그러니 임금과의 술자리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살얼음판 같은 자리였다. 예컨대 세조는 틈만 나면 신숙주를 역대 이상적인 군신의 상징인 ‘제 환공의 관중, 한 고조의 장량, 촉 선주(유비)의 제갈공명, 당태종의 위징’이라 칭했다. 군신관계를 떠나서도 두 사람은 ‘1417년 닭띠’ 동갑내기였다. 어느 날 연회에서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고 술을 마시면서 “경(신숙주)도 내 팔을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역시 인사불성이 된 신숙주는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세조의 팔을 힘껏 잡았다. 너무 세게 잡아당겨 비튼 셈이 됐다. 세조가 “아파! 아파!”하고 비명을 지르자 곁에 있던 세자(예종)의 안색이 변했다. 세조가 예종에게 “괜찮다”면서 흥을 깨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명회는 술자리가 파한 뒤 신숙주의 집에 청지기를 보내 신신당부했다. “ 자네는 평소 만취해도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등불을 켜고 책을 본 뒤 잠자리에 드는 습성이 있지. 그러나 오늘은 절대 그래서는 안되네. 곧바로 불 끄고 잠자리에 들게.”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책을 들춰보던 신숙주는 한명회의 전언을 듣고는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조가 한밤중에 넌지시 내시를 불러 “신숙주의 집에 가보라”라고 지시했다.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침수에 들었다.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한 척하며 일부러 임금의 팔을 비튼 게 아니냐고 의심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신 초상화 신숙주
오사모(왕이나 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착용한 검은색 사 로 만든 모자)에 녹포 단령(깃을 둥글게 만든 관복)의 관복을 입은 정식 초상화로서,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화폭은 비단을 이어 붙였으며 얼굴 표현이 들어가는 중간 부위는 넓은 폭을 사용하였다. 양 팔꿈치 부분에서 양 끝은 좁은 폭을 사용하여 결국 3폭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연폭 형식은 조선시대 전기의 초상화 가운데 원본에서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이 화상에서 흉배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흉배는 바탕천에 직접 금박 혹은 문양을 짠 수법이다. 후대의 자수 방식과 달리 명나라 제도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흉배의 문양은 구름과 기러기로서 문관 2품 때의 도상이다. 즉 1455년 좌익공신(세조가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훈호) 때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화면의 오른편 여백에는 “조선 영의정, 고령부원군, 시호는 문충, 호는 보한재, 신숙주, 자는 범옹의 진영[朝鮮領議政高靈府院君諡文忠號保閑齋申叔舟字泛翁眞]”이라는 제기(글의 첫머리에 쓰는 제목을 이르는 말)가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성종조 을미년(1475) 공이 졸거한 후 70년이 지난 을사년(1545)에 개장했다 [成廟乙未公卒後七十年乙巳改粧]”라고 적혀 있어, 1475년(성종 6년)에 개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화법에 있어 안면은 음영 처리가 되어 있는데, 후에 보채 되었다. 그 표현 기법으로 미루어 보아 개장 이후에 다시 가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살색은 선염이나 준찰로 이루어져 있다. 눈꺼풀 및 동공 처리의 묵선에도 섬세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안면이 지닌 굴곡에는 자연스러운 선염 효과가 이루어져 착색의 묘를 살리고 있다. 의복의 윤곽선 및 옷주름 처리 역시 절묘하다. 의복의 윤곽은 각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옷주름 처리는 필요한 부분에만 강인한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보다 의미 있는 것은 녹의에는 진녹색 선으로, 빨간 내공에는 붉은 선으로, 남색에는 진남색 선으로, 보라색에는 진보라 선 등으로 이른바 동색계의 짙은 색선으로 처리하여 색감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띈다. 족좌대 역시 남색에는 짙은 남색선을 두르고 고동색 나무에는 까만 선으로 테두리를 지워 윤곽선이 의식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필(筆)과 묵(墨)에서 모두 세련된 기법을 연출하였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안면과 옷주름에 구사된 선의 성격이 상이하다는 점이다. 얼굴은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옷주름은 빳빳한 선으로 처리되어 그 다양함을 보여 준다. 신숙주 영정은 전신의 묘미·필법·설채의 완전함이 전화면에 미친 가작으로서, 작품 자체로서도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에 있는 초상화이다.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었으며 가로 109.5cm, 세로 167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