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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집현전 학자 이개의 출생및 관직생활 그리고 충심이 담긴 방안에 혔는 촛불 시조

by yesjenny486 2025. 8. 3.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관리로,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사육신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그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활동했고,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처형되었습니다. 오늘은 이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개가 조정의 소식을 전하며 보낸 편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현전 학자 이개의 출생 

 

 

1417년(태종 17)에 태어나 1456년(세조 2)에 사망했다. 본관은 한산. 자는 청보· 백고,  호는 백옥헌(白玉軒)  이며 이개는 제6대 왕 단종을 위해 사절한 사육신의 한 사람이자, 이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사 이종선이다. 아버지는 이계주이며, 어머니는 진명례의 딸이다.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 은 그의 종증손이고, 조선 중기의 동인, 북인의 당수 아계  이산해 는 그의 종현손이 된다. 집안 내력으로  이개는  시문(詩文)과 글씨를 잘 지었다고 전해지며 20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며 집현전 학자로 발탁되게 된다. 동갑내기 박팽년과 이개가 집현전에 들어간 지 2년이 지나 들어온 신숙주, 하위지, 성삼문과 같이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사육신으로 처형당한 이개의 자료는 후대에 많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거사에 실패하고 멸문지화를 당하여 자료들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너무 전해지는 바가 없고 실록에도 많이 등장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이 시는 성삼문 등과 함께 거열형을 당하는 날, 형장으로 향하는 수레에서 읊은 시이다.

. “우정(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해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 · 홍모(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 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 현릉(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이개는사육신 거사에는 실퍠했지만  끔찍한 거열형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충신의 표상이 되었다.

 

이개의 관직생활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 선인들이 남긴 좋은 풍습이나 전통 )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 고려 및 조선 초기 문과 급제자의 등급 중 제술업에 급제한 사람의 등급 )로 급제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明皇誡鑑)』의 편찬과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해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고, 이 해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8년 지대구군사  이보흠 이 조정에 사창( 조선시대 각 지방 군현의 촌락에 설치된 곡물 대여 기관  )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 차기 국왕으로서의 왕세자에게 경사 를 강론해 유교적인 소양을 쌓게 하는 교육의 장 )을 열어 사( 조선시대에 유교적 이념에 기초한 정치구조에서 왕위 계승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스승을 상징하는 직책 ) · 빈( 관례를 주관하는 큰 손님 )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좌문학( 조선 시대 동궁(왕세자)을 보좌하는 관직 중 하나 )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 왕세자나 왕을 대상으로 학문과 덕행을 가르치는 중요한 행사 )했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인 ·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할 때,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封君)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한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써 아뢰었다. 이 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한 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상왕의 복위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 · 하위지 · 유응부 · 유성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때 이개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시를 지어 읊었다고 한다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전부수찬인 허조도 단종 복위의 모의에 참여해 자결하였다. 사후에 남효온이 당시 공론에 의거해,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 전(六臣傳)」을 지었다. 이 「육신 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 시켰다.. 1758년(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 홍주의 노운서원등에 제향되었다. 

 

 

이개의 시조 방안에 혔는 촛불 

 

 

방안에 혔는 촛불 - 이개(李塏)  "방안에 혔는 촛불 눌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다. 우리도 천리에 임 이별하고 속 타는 듯하여라."  어휘를 풀어보면 <혔는> : 켜 있는. <눌과> : 누구와 <모르는다> : 모르느냐?인데 현대어로 바꾸어보면 " 방 안에 켜 놓은 저 촛불은 누구와 이별하였기에, 겉으로는 눈물 흘리며 속이 타는 것을 모르는가? 저 촛불도 나와 같아서 눈물만 흘릴 뿐,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구나 "이다  풀이를 해보자면 이 시조는  영월땅으로 귀향간 단종과 이별하고 남몰래 애태우는 심경을 노래한 것으로, ‘홍촉루가(紅燭淚歌)’라고 부른다. ‘촛농’이 흘러내리는 것을 자신의 눈물에 비유하고, 심지가 타들어가는 것을 애타는 마음에 비유하였다. 또  촛불이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이 자신도 촛불처럼 임을 위하여 몸을 태워 보리라는 굳은 결의가 깃든 것이라 해석된다. 그러나 이개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이 되었으니, 자신의 몸을 태워 대의(大義)를 밝힌 것과 다름이 없다. 하여튼 피맺힌 충성심이 함축성 있게 표현되었다. 단종과 이별을 하고 나서 남몰래 애태우는 심정을 촛불에 감정이입을 하여 촛불을 의인화하고 그 초가 타는 형상을 이별의 슬픔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표현하며 초중종장은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단종과의 이별의 아픔을 형상화한 수준 높은 작품이며 옥중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개는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호는 백옥 헌(白玉軒),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사육신으로 국문을 당할 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 면서도 태연하였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車列刑)을 당하였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고 한다. 우정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 또한 소중하지만 홍모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 새벽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