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로서 세종 때는 기술관료로서 <훈민정음> 해례 등 문화와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관료였으나 세종 사후에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동조하며 훈구파의 중추로 권력을 누린 권신으로 변모한 인물이고 후배 신숙주와 같은 행보를 걸은 인물입니다. 오늘은 이런 정인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정인지 출생및 관직생활
1397년 2월 4일 ( 태조 5년 12월 28일 을시)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석성현감(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을 지낸 정흥인 입니다. 정흥인이 내직별감에 있을 때 도교의 신을 제사 지내는 사당인 소격전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킬 아들을 낳게 해 달라"라고 빌었고 얼마 뒤에 아내 진 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정인지였다. 어찌나 총명했는지 기록에 의하면 5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서책에 눈길만 스쳐도 줄줄 외울 수 있었고 한 번만 보면 읽고 쓸 줄 알아 천재라는 소문이 이웃에 자자하였다고 한다. 고전을 암송하고 작문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7살에 《소학》을 깨우쳤고 13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 앞에서 강론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배우자를 보면 정부인 한양 조 씨 - 조후의 딸과 계부인 경주 이 씨 - 이 휴 의 딸을 두었으며 자녀는 5남 1녀를 두었다. 이중 조 씨 소생 으론 1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 정광조와 장녀 - 안동 권 씨 권금성의 처이다. 계부인 이 씨 소생으론 4남을 두었는데 차남 - 정현조 , 3남 - 정숭조 , 4남 - 정경조 , 5남 - 정상조이다. 그는 1411년(태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4년(태종 14년) 권우 가 주관하였던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급제 후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예빈시의 주부로 발령받았고, 이후 사헌부의 감찰,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태종이 세종에게 정인지는 크게 등용할 만한 인재라고 추천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세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정인지는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거쳐 집현전의 응교로 발령받았다. 집현전은 세종이 집권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구로서, 국가의 제도 정비에 필요한 각종 학술연구의 중심기관이었다. 정인지의 집현전 발령은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할 수 있는 기회였고, 또한 그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정인지의 업적을 간략하게 보면 훈민정음 창제 참여 및 해례본 서문 작성: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하여 세종대왕을 보좌했으며, 해례본의 서문을 작성하여 훈민정음의 제정 이유와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또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 등 역사서 편찬에 참여하여 조선 초기의 역사 기록 정립에 기여했으며 천문학에도 밝아 천문 관측 기구 제작과 역법 연구에 참여했고 역법서인 『칠정산』 편찬에도 기여했습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 연구에도 참여하여 조선 시대 음악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뛰어난 문장가로서 다양한 글을 남겼으며, 특히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은 그의 문장력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병조판서, 좌의정, 영의정부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 활동에도 참여한 조선시대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세종 서문을 완벽하게 풀이하면서 한글 반포의 맥락과 한글 우수성과 가치를 쉽고도 명쾌하게 풀어낸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을 보면 "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소리를 바탕으로 글자를 만들어서 만물의 뜻을 통하고, 천지인삼재의 이치를 실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능히 글자를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구별되므로 말소리의 기운 또한 다르다. 대개 중국 이외의 딴 나라 말은 그 말소리에 맞는 글자가 없다. 그래서 중국의 글자를 빌려 소통하도록 쓰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모난 자루를 둥근 구멍에 끼우는 것과 같으니, 어찌 제대로 소통하는 데 막힘이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은 각각의 처한 곳에 따라 편안하게 할 것이지, 억지로 같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동방의 예악과 문장이 중화와 같아 견줄 만 하나 오직 우리말이 중국말과 같지 않다. 그래서 한문을 배우는 이는 그 뜻을 깨닫기가 어려움을 걱정하고, 범죄 사건을 다루는 관리는 자세한 사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했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처음 만들어서 관청과 민간에서 지금도 쓰고 있으나, 모두 한자를 빌려 쓰는 것이어서 매끄럽지도 못하고 막혀서 답답하다. 이두를 사용하는 것은 몹시 속되고 근거가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 언어사용에서는 그 만 분의 일도 소통하지 못한다. 계해년 겨울(1443년 12월)에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예의’를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이 글자는 옛 ‘전자’처럼 모양을 본떴고, 소리에 따라 만든 소리 짜임새는 음률의 일곱 가락에 들어맞는다. 천지인삼재와 음양 이기의 어울림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여덟 자로써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정밀한 뜻을 담으면서도 두루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슬기롭지 못한 이라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 이 글자로써 한문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글자로써 소송 사건을 다루면, 그 속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글자의 운으로는 맑고 흐린 소리를 구별할 수 있고 음률로는 노랫가락이 다 담겨 있다. 글을 쓰는데 글자가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으며, 어디서든 뜻을 두루 통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 비록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소리, 개 짖는 소리라도 모두 적을 수 있다. 드디어 임금께서 상세한 풀이를 더하여 모든 사람을 깨우치도록 명하시었다. 이에, 신이 집현전 응교 최항과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와 수찬 성삼문과 돈녕부 주부 강희안과 행 집현전 부수찬 이개와 이선로들로 더불어 삼가 여러 가지 풀이와 보기를 지어서, 그것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대체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이도 스스로 깨우치게 하였다. 그 깊은 근원과 정밀한 뜻은 신묘하여 신들이 감히 밝혀 보일 수 없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업적이 모든 왕들을 뛰어넘으셨다. 정음 창제는 앞선 사람이 이룩한 것에 의한 것이 아니요,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다. 참으로 그 지극한 이치가 아주 많으며, 사람의 힘으로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다.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무릇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온전하게 이루게 하는 큰 지혜는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정통 11년(세종 28년, 1446년) 9월 상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정인지는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삼가 씁니다" 후대에도 깔끔한 어휘력과 문장력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던 왕과의 술자리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과 신하가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밤이 아닌 아침에 술자리가 많았는데, 아침 조회인 상참이 끝나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왕 중에서 최고의 애주가를 뽑는다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수양대군, 바로 세조다. 최고의 애주가라고 할 만큼 신하들과 다양한 에피소드를 남겼는데, 주사를 부려 죽을 뻔한 사람, 의심받아 암살당할 뻔한 사람, 그리고 아예 사형당한 사람도 있었다. 결국 삶과 죽음이 교차한 왕과의 회식자리. 그래서 조선 역사상 가장 큰 3가지 사건중 정인지의 에피소드를 알아보면 요즘 표현으로 왕과의 야자타임을 가졌다고 한다. 아무리 야자타임이라고 하지만 왕에게 말을 놓기란 가히 상상도 못할일다 하지만 정인지는 세조에게 대놓고 너라고 하였다 한다. 집현전 학자들과 우리 문학 사상 최초의 한글 시 ’ 용비어천가’ 지은 정인지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계유정난의 1등 공신으로 책봉된 인물이다. 정인지에 대한 세조의 신뢰도 특별했는데, 문제는 그가 술이 무척 약해서 사고를 자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것도 네 번이나 저지른다. 가장 유명한 것이, 세조 4년(1458) 경회루에서 대소신료를 불러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던 일이었다. 이때 정인지는 세조를 면전에 두고 역사에 남을 말을 남긴다. 바로 최고 권력자 세조에게 “너[汝]”라고 한 것. 왕에게 너라고 했으니 중죄 중의 중죄였다. 중신들은 처벌을 간청했으나 의외로 세조가 일축을 한다. 하지만 정인지의 실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세조 말년에는 아예 실질적인 왕의 자리에서 내려온 '태상(상왕)'이라고 부른 것. 신하들도 이번에야말로 정인지를 벌하자고 간언 했다. 하지만 세조는 "늙은 영감이 그랬는데 뭘 그러냐"라며 넘어간다. 21살이나 나이가 많기도 했고, 이미 퇴역한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린 것이다. 결국 세조가 정인지를 경계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그 뜻은 정인지가 세조를 뒤엎을 정도로 세력이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과의 술자리는 힘들었던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