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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집현전 학자 최항 의 출생과 세종대왕의 꿈 관직생활및 후대의 평판과 묏자리 관련 일화

by yesjenny486 2025. 8. 6.

 

 

집현전 학자 중에 한 사람으로  훈민정음창제에 참여했으며 용비어천가를 주해 (본문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는 것 )하였습니다. 계유정난 때 공을 세워 1등 정난공신이 되었으며 공조판서까지 또 세조 때 영의정까지 오른 최항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집현전 학자 최항

 

 

최항의 출생 및 세종의 꿈 

 

 

최항은 1409년에 경기도 통진현 (현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학운리 삭시마을) 에서 태어났으며 제33대 영의정을 지낸 조선의 문신이자 집현전 학사 출신 학자이다. 자는 정보, 호는 태허정·동량, 시호는 문충. 문정이며, 본관은 삭녕이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 최사유이며 어머니는 오섭충의 딸이다. 최항의 할아버지는 최윤문이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즉 증조부가 최충이다. 해동공자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진 최충은 고려전기 문벌귀족사회의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고려는 이전의 고대국가들과 달리 출신성분에만 의거하여 개인의 정치적 지위를 결정짓던 사회가 아니었다. 좋은 혈통을 타고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고려 사회에서는 관직에 진출해 공적을 드러내었을 때 비로소 최고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추측해 보았을 때 최항은 명문가 집안의 자손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최항의 배우자는 달성 서 씨 서미성의 딸로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둘 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장남은 예조참의를 지낸 석포 최영린이고 차남은 사옹원 정을 지낸 최영호이다. 최항은 26세에 알성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종이 아끼던 관진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일화에 의하면 과거 성적을 발표하기 전날 세종이 꿈을 꾸었는데 성균관에 있는 잣나무를 용이 휘어 감고 있었고 다음날 꿈을 이상하게 여긴 세종이 잣나무 아래에 갔는데 거기에서 최항이 낮잠을 자고 있었고 다음날 과거 합격자 명부에 최항의 이름이 제일 위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사실 유무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만큼 최항이 세종의 마음에 든 인물이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최항의 관직생활

 

 

1426년(세종 8 병오)년 식년시 생원•진사  양시 사마시에 합격하고, 1434년(세종 16년) 식년시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에는 집현전 학사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훈민정음》을 한글로 옮겨 풀었으며, 〈용비어천가〉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 1444년 집현전 교리로서 오례를 찬진, 1445년 집현전 응교로 용비어천가를 창제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등을 찬진 하였으며, 1448년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다. 1450년 선위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접대를 하였으며 우사 간대부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51년 좌사간대부로 수사관을 겸하여 고려사를 개찬하고, 집현전 부제학에 올라 통감훈의를 편찬하여 그 공으로 가자되었다. 이어 문종실록에 참여하였다. 1453년(단종 1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절재 김종서를 제거한 수양대군을 맞이하여, 단종에게 보고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이후 도승지가 되었다. 이듬해에 이조 참판이 되어 《공신연곡》 4장을 지어 바쳤다. 연이어 대사헌, 우부빈객,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55년(세조 1년) 좌익공신 2등에 책록 되고 공조 판서에 승진하였으며, 이후 1458년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하며 1459년(세조 5년) 《육전》의 편찬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 《십이준도》 등을 찬하였고, 중추원사로 《명황계감》의 가사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동국통감》을 찬수 하였으며, 신숙주 등과 같이 《어제유장설》 3편을 주해하였다. 이후 중추원사, 세자빈객, 예문관 대제학으로 대사성을 겸 하고, 1460년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하다가 1461년 양성지의 잠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1463년 우참찬 좌참찬을 역임하고 동국통감을 찬수를 시작하는 한편 어제유장설을 주해 하였다. 1464년(세조 10년) 사서오경을 구결을 달았으며, 1466년 판병조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어제구현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가자를 받았으며, 《병장설주》를 산정하였다. 1467년에 우의정·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이르러 영성군에 봉 해졌다. 《소학》, 《주역구결》, 《예기구결》등을 정하고 세조의 행장을 초집하였다. 1467년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1470년 영성 부원군에 진봉 되었다. 한편 1461년(세조 7년)에는 왕명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9년(예종 1년) 경국대전 상정소 도제조로서 《경국대전》을 찬수하였으며, 이어 무정보감을 찬수하였다. 1471년에서 이듬해 1472년까지 1년간 조선국 상급 국상 지위를 지낸 그는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의 호를 받아 좌의정이 되기도 하였고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찬수하였으며, 조선초기의 대학자로서 문물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하였고, 역사·언어 분야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여, 당시 명나라(중국)에 사신 편에 보내는 표전문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고 전해진다.

 

 

 

최항의 평판 및 묏자리 관련 일화 

 

그는 18년 동안 집현전 관원으로 있으면서 경연관 · 지제교로서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례 · 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고제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서거정이 찬한 비명, 『필원 잡기』, 김육이 지은 『해동명신록』의 것과 『성종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그의 성품이 겸공 · 간정 · 단개 · · 공정하고 정관 · 위좌하며, 침착 신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청백하여 재산을 탐하지 않으며, 40년 간 벼슬했으나 한 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다고 극구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겸근과언과 정관 · 위좌하였다고 한 것은 거의 비슷하나, 일을 처리하는 데 결단성이 없고,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한번도 인사를 건의하는 일이 없이 우물쭈물 넘겼으며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문형에 있던 사람이 의정으로 임명되면 반드시 문형직을 사양하는 것이 예였는데 그는 오히려 사양하지 않고 겸했다고 못마땅하게 평하고 있다. 특히, 가정 문제에서도 부인의 성품이 사나워서 집안일은 부인의 주장대로 행해져 자유가 없었다고 하고, 혼사에 있어서도 인품이 아닌 재산만을 보고 사위와 며느리를 얻었다고 혹평하고 있다. 『성종실록』 졸기에 보이는 이와 같은 혹평은 당시 삼사 계통에 진출하여 훈구대신들을 공격하던 사림 계통의 신진 관료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서로 『태허정집』 · 『관음현상기』가 있다. 태허정 최항은 66세의 나이에 서거하였고 남한산성 인근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마리 기현에 예장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라 하였다. 그의 배위인 정경부인 달성 서 씨는 달천부원군 서미성의 따님이고 양천 군근 선생의 외손녀요 대제학 권제의 생질녀이며 사가정 서거정의 누님으로 재능이 뛰어나 관찰하는 식견이 높았는데 태허정 공의 장지를 둘러보고 두 아들이게 이르기를 "이곳은 절손이 될 혈이니 마땅히 이장을 해야 좋겠으나 나라에서 정한 예장장지이기 때문에 감히 이장흔 할 수 없으므로 내가 죽거든 반드시 각장으로 하라 "하여 문정공과 각장으로 할 것을 결심 문정공표에서 마주 보이는 타혈에 직접 자기의 묏자리를 정해두고 후일에 정경부인을 이곳에 따로 장례 하게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