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선] 풍기대의 구조와 원리 믿음을 담음 문양들과 풍기대를 만들게된 이유 그것을 관리하던 관상감

by yesjenny486 2025. 7. 25.

 

 

세종 시대 풍기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된 도구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이 중요했기 때문에 날씨, 그중에서도 바람의 관측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 풍기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깃발(풍기)을 달아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했습니다. 세종 시대에는 측우기와 함께 풍기대도 사용되어 기상 관측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보물제 847호 경복궁 풍기대

 

 

풍기대의 구조와 원리 

 

풍기대(風旗臺)는 높이 228㎝ 로  바람의 세기와 함께 바람이 부는 방향을 관측하기 위해 깃발(風旗)을 꽂아두었던 받침돌로, 오늘날의 풍향계와 같은 원리이다.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들었는데, 아래의 받침돌은 네모꼴로 그곳에 모양이 마치 소반(小盤)과 같은 상(床)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구름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긴 팔각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팔각기둥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이 기둥 옆 33㎝ 아래에는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수시키는 구멍이 뚫려있다. 풍기대는 꼭대기에 나있는 구멍에 풍기죽(긴 헝겊을 매달아 풍기대에 꽂아 놓는 대나무 )을 꽂고, 풍향은 24방향으로 표시하고 풍속은 그 강도에 따라 8단계 정도로 분류했다.
동궐도속의 창경궁 중희당 앞마당에 그려져 있는 풍기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풍기대의 구멍에 가늘고 긴 장대인 깃대를 꽂았는데, 그 깃대 꼭대기에는 가늘고 매우 긴 깃발을 달았음이 살펴진다.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재었던 것이다. 관상감(觀象監)에서 풍기대를 이용하여 풍향과 풍속을 관측하고 기록했습니다
현재는 1770년(영조 46)에 만든 창덕궁(昌德宮) 풍기대와 경복궁(景福宮) 풍기대가 남아 있으며, 이밖에 그 후에 제작된 풍기대가 현재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앞뜰에 남아있다.  창덕궁 풍기대는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하부 받침돌 높이는 92.4cm, 넓이는 62.8 x 61.5cm, 8각 기둥 높이는 135.7cm, 구멍의 지름은 4.3cm입니다


풍기대를 만들게 된 이유와  믿음을 담은 문양들 

편서풍이 불면 날씨가 좋을 것이고, 동풍이 불면 궂은 날씨가 될 것이라는 말은 예부터 우리 선조들이 경험으로 알아온 초보적인 기상 상식이었다. 그러나 궁궐 안은 높은 담장 때문에 바람의 방향이 들판과는 달라서 높은 나뭇가지에 깃발을 달아서 바람의 방향을 알아왔다. 그러나 높은 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고 또한 깃발이 가지에 휘감기기 때문에 자주 살펴야 했다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해서 대를 세우고 그 위에 장대를 꽃아서 깃발을 달았다 이것이 풍기를 꽂는 풍기대이다. 풍기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면에 문양이 있는데 이 문양들은 우리 조상들의 믿음이 담겨 있는 의미 있는 문양이다. 덩굴은 당초 혹은 인동초를 가리키는데 인동초는 추운 겨울을 견딜 뿐 아니라 덩굴을 이루며 끊임없이 뻗어가기 때문에 장수와 대 이음을 상징하고 구름은 천신이나 신령들이 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만물을 자라게 하는 비의 근원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기에 용이나 학과 같은 동물들과 함께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으며 장수와 왕의 권위를 상징했습니다. 영지버섯은 옛 조상들에게는 신선의 풀로 여겨졌으며 이것을 먹으면 불로장생한다고 믿었다. 자연현상을 예측하기 어려웠던 시절 농업의 번영을 위해 우리 조상들은 간절한 마음 담아 풍기대를 만들었다.

 

 

 

 

관상감이란 

조선시대 천문 · 지리 · 역수(曆數) · 점산(占算) · 측후(測候) · 각루(刻漏)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였기에 신라에서는 첨성대를 만들어 측후에 대비하기도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건국 초에 천문관서로서 태복감·태화국을 두었다가 뒤에 사천대·사천감·관후서·서운관 등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조선시대에는 1466년(세조 12)에 이를 관상감이라 개칭해 예조에 속하게 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사력서로 개칭했다가 중종 때에 다시 관상감으로 환원하였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관원은 다음과 같다. 영사는 영의정이 겸임하고, 제조 2인, 정(정 3품) 1인, 부정( 종 3품) 1인, 첨정( 종 4품) 1인, 판관(종 5품) 2인, 주부(종 6품) 2인, 천문학·지리학교수(종 6품) 각 1인, 직장( 종 7품) 2인, 봉사( 종 8품) 2인, 부봉사(정 9품) 3인, 천문학·지리학 훈도(정 9품) 각 1인, 명과학훈도(정 9품) 2인, 참봉(종 9품) 3인을 두었다. 이 밖에 산원(散員)이라 하여 천문학·지리학·명과학 분야로 나누고 임시직 인원을 다수 채용하였다.

세종 때 경회루 북쪽에 천문 관측 기구인 간의대를 만들었고, 선조 때 흠경각을 지었다. 또 영조 때 다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석각의 천문도를 설치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상감은 폐지되고 관상국이 설치되었는데, 기구가 축소되어 소장·기사·기수·서기 등 약간 명만 두어졌다. 관상감은 지금의 기상청과 천문대에 해당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현대빌딩 앞마당에 그 유적인 일영대가 남아 있다.